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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옥합을 깨뜨릴 때 (막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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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는 자기 이름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을 ‘공명심’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명예욕이라고도 합니다. 산엘 가면 나무껍질에 자기 이름을 파놓고 간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보게 됩니다. 혹은 그 탄탄하고 억센 바위 위에 ‘년 월 일 다녀가다’라고 새겨놓고 간 사람도 있습니다. 나무를 파는 것은 칼만 있으면 되지만 돌을 파는 것은 상당한 장비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망치라든가 정 같은 연장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아예 산에 갈 때 자기 이름을 남길 양으로 장비를 준비해서 올라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뜻대로 안될 경우에는 힘으로, 돈으로라도 이름을 얻고 권력을 쟁취해서 누려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관매직’이란 말도 생겨났습니다.

1. 그러면 이 여자는 어떤 여자입니까 나폴레옹 같은 영웅입니까 시저 같은 정치가입니까 잔다크, 유관순 같은 애국여성입니까 그러면 당시 빌라도총독이나 헤롯왕의 영부인입니까 아닙니다. 평범한 한 여인이었습니다. 베다니 마을에서 마르다 나사로와 함께 살고 있던 외로운 삼 남매 중의 하나인 마리아였습니다. 가난한 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2. 그런데 평범한 한 여자의 이름이 이토록 하늘의 별처럼 높이 빛날 수가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주를 높이면 주께서도 나를 높여 주신다’는 진리 그대로입니다. 이 여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만 사랑했습니다. 곤충에서는 보호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풀 속에 사는 곤충은 자기 몸은 풀색으로 변합니다. 가을이 되어 낙엽이 지면 곤충은 낙엽색으로 변합니다. 온 세상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위해 전폭적으로 자기를 바치는 신앙이 변치 않았습니다.

3. 이 여인은 가난했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자신의 귀한 것을 바쳤습니다. 사랑의 낭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헨리의 ‘박사의 선물’이란 이야기 한 토막이 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가난한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했기 때문에 돌아올 성탄절 선물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금시계를 팔아 여자의 머리핀을 샀고 여자는 이십년간 길러온 자기의 머리카락을 잘라 시계 줄을 샀습니다. 성탄절 이브에 보면 남자가 상대방 여인에 머리핀을 꽂아주려 보니 머리카락이 없고 여자도 자기가 사온 시계 줄을 남자에게 채워주려고 하니 이미 시계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더욱 사랑의 맹세를 굳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자기의 모든 기쁨으로 희생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옥합을 깬 여인은 요 12:3에 마리아라고 되어 있으며, 눅 7장에는 큰 죄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음하다 집힌 여자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위해 옥합을 깨뜨려서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쏟아 바쳤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희들은 주님을 위해 시간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돈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정성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병아리가 햇빛을 보고 세상에 태어나려면 달걀껍질을 깨야 합니다. 하나의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고고성을 기르려면 어머니의 태에 연결된 탯줄을 끊어야 합니다. 깨뜨릴 것을 깨뜨리고 끊을 것을 끊어야 드디어 새로운 생명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인도에서 나오는 나드라는 향목에는 만들어내는 향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도산 나드향이라고 합니다. 그 향유는 일년간의 노동력에 해당하는 값비싼 향유입니다. 그러나 이 비싼 것을 주님께 바친 것은, (1) 과거를 청산하는 결정의 순간이었습니다. 옥합의 나드를 쏟지 않고 옥합을 깨버리고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미련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옥합을 남겨 두면 또 그 돈 생각이 날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주님을 따를 대 배와 그물을 버리지 않고 주님을 따랐더라면 미련이 남을 것입니다. 사람은 악의 미련을 남겨두면 언제나 다시 범죄 하게 됩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를 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계 3장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인처럼 미지근하게 주님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왕상18장에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머뭇거리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2) 옥합을 깬 이유는 우물쭈물하면 마음이 변할지 모르니 순식간에 깬 것입니다. 사람은 오래두고 생각하면 마음이 변합니다. 행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십시오. 신앙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헌금하는 일이나 성수주일하는 일이나 결단을 내려 실천해야만 합니다. (3) 이것은 단 한 번의 마지막 기회를 잘 포착한 지혜였습니다. 이 기회는 최초이요 마지막 기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난한 자의 구제는 평생을 할 수 있는 구제지만 예수님께 나드를 드려 봉사하는 기회는 마지막 기회, 유일한 기회입니다. 큰 기회요, 역사에 남을 기회요, 칭찬받을 기횝니다. 전도서엔 3:1에 “천하의 범사가 다 기한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파숫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때를 물었습니다. 고후 6:2에 “지금은 은혜 받을 때”라고 했습니다. (4) 앞날을 결심하는 소망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녀는 옥합을 깰 수 있었기에 두려움 없이 험한 골고다 언더 길을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 지켜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눅 23:27) 그녀의 옥합은 장차 장례의 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귀한 장례의 기름은 수제자 베드로도, 사랑을 받던 요한도 할 수 없는 것을 해냈습니다. 그년가 드린 기름은 장차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을 소망하는 기름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행위도 영원한 기념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 이 기사를 읽고 은혜 받고 거듭난 자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주님은 날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의 피를 흘려 나를 구속시켜 주셨는데 나는 주를 위해 무엇을 바칠 것입니까 미련 있는 옥합, 부정 있는 옥합,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옥합은 다 깨버리고 주님께 바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주님을 경배하고 따를 수 있는 축복이 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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