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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막 08: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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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소님이 올 때 집안을 슬고 가구를 정돈하고 꽃을 꽂고 그리고 영접하듯이 예수를 우리 마음에 영접할 때에도 마음속을 깨끗이 하는 작업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귀한 손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그 손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도 알아 두어야 합니다. 손님을 맞으려고 하는 사람이 그 손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영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인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는 중에 은혜 받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 자신이 자기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말씀입니다. 여기 인자는 물론 예수님을 가리킴이요, 예수 자신이 그 인자되신 예수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질문에 그들이 들은 그대로 말했습니다. “어떤 이는 세례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는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하더이다” 이 대답은 예수에 대한 좋은 평판만을 골라서 한 대답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경하고 아끼는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밖에도 예수님께 대한 여론은 분분하였고 예수에 대해서 악담과 비판을 일삼는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저는 죄인의 친구라고 조롱했고 어떤 이는 잔칫집에서 예수님께서 포도주도 즐겨 자신 분이라고 흉보았고 십자가상에서는 남을 구원하였으되 자기 자신 하나 구원 못하는 자라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그중 로마 백부장은 과연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하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고백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여러 면으로 보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여러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기독교는 아편이라고 보고 기독교를 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예수를 평론만 하고 믿지는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예수는 자신을 인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인자란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되어 오신 하나님을 이렇다 저렇다 말만 하여도 괜찮은 것입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것입니까 그 인자되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죄악에서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구원자 예수를 몰라도 괜찮은가 말입니다. 태평양과 대서양이 지구를 동반구와 서반구로 갈라놓는 것 같이 예수를 모르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요, 결코 이야기거리로 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고 분명히 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예수는 역사적 인물입니다. 요사이 신학자들 간에 예수가 참 역사적인 인물이냐 그렇지 않으면 신앙고백상 가상적으로 만든 인물이냐 하는데 대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란은 독일 신학자 볼트만이란 사람에게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논란도 신학자들 간에 연구 대상으로 한가롭게 떠들 수 있는 것이지 일반 신자들의 순수한 신앙에는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요 오히려 교회를 어지럽히고 해롭게 하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역사성에 관하여 의심을 한다거나 부정을 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와 근거를 부인하는 것이요 신앙의 대상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 네 복음서에는 예수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흔적이 많이 있음을 봅니다. 마 1장의 예수의 족보는 다른 목적에서 기록한 것이 아니요 다만 예수님의 역사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밝혀놓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다윗까지 14대,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까지 14대, 바벨론 포로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14대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는 42대의 손입니다. 예수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신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 ‘인자’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지 않은 사실에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맞이하면서 크리스마스(X-mas)의 기쁨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십니다. 예수의 출생은 일반 사람들과 달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탄생 과정과는 달리 특별한 방법에 의해서 탄생하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됨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래만야 옳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사람과 같이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경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해석할 수 없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부활, 승천, 그리고 많은 이적들입니다. 기독교는 지식과 이성의 종교가 아닙니다. 과학의 지식과 같이 반드시 실험상으로 증명되어야 진리가 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기독교에는 적용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를 중학생들이 생물학 시간에 실험관에서 증명하듯이 증명을 통한 설명을 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과학적인 증명에 의해서 그 존재가 밝혀지는 과학 세계의 영역에 속하신 분이 아니라 인간 과학에 초월하여 계신 분이십니다. 성경의 진리를 비과학적이나 비이성적이라 해서 믿지 않는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를 모르는 인간의 신앙이 적은 까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과학이나 이성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이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 하나님의 신비에 속하는 일들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인간과 똑같은 방법으로 세상에 오셨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가 더욱 어려울지 모릅니다. 무엇인가 인간과 다른 점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런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인간,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마스는 이러한 초월적인 초자연적 잉태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서 의심 없이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였습니다. BC700년에 선지가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하였습니다. 마 1:23에서는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이름이 그 사람의 성격과 운명을 암시해 주는 예가 많습니다. 아담-흙, 전 인류, 하와-만민의 어머니, 아브라함-많은 사람의 아비, 이삭-웃음, 사울-하나님께 구했다, 바울-지극히 적은 자, 에서-붉다, 야곱-발뒤꿈치를 잡은 자, 베드로-반석,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예수-만민의 죄를 짊어지는 자=여호수아, 임마누엘-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 즉 예수는 하나님이신데 우리 인간들과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예수 자신을 위해서 나신 것이 아니요 우리를 위하여 났으며 우리를 위하여 사시다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희생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은 우리를 위한 생입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도와주셨으며 우리가 믿을 분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우리 인간의 삶의 어느 순간에도 어느 장소에도 함께 역사하신다는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가 무엇을 겁내고 무서워 한 것이 있습니까 베드로의 신앙은 남을 모방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기독교 교리사에서 가장 빛나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주님은 기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적은 수의 제자이지만 제자들이 입을 열 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됨을 만민에게 전파할 것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예수는 역사적인 인물이요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분이요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뜻을 분명히 알고 그 하나님을 우리의 생활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능력 있게 사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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