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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후 수습책 (삼하 19: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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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반란을 진정시키고 재 집권한 다윗은 자기를 대적하였던 자들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신앙가로서의 덕이요 지혜로운 정치의 진리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반역자들이 다윗에게 항복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승리의 행렬에 끼어들었습니다. 다윗이 요단을 건느려 할 때 다윗을 저주하번 베냐민 사람 시므이가 베냐민 지파 대표로, 그리고 므비보셋의 종 시바, 므비보셋, 그리고 이스라엘 온 사람들이 나와서 그 행렬을 맞이하였습니다.

1. 이적행위자 색출문제 (1) 시므이(삼하 19:16-23) 바후림에 거주하는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유대인의 환영대열에 끼여 천명의 베냐민 지파를 이끌고 마중을 나왔습니다. 다윗의 피난길에 시므이는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피흘린 자여 가거라 가거라”하면서 저주하던 교활한 자입니다. 그런데 시므이는 다시 다윗을 환영하는 대열에 앞장서서 다윗을 맞이한 것입니다. 아비새는 다윗에계 “저 개같은 시므이를 단칼에 죽이게 하소서” 하며 죽이도록 허락할 것을 요청했으나, 다윗 왕의 너그러운 처사와 그리고 시므이는 용서를 구해서 사죄를 받았습니다. 시므이는 용서는 받았으나 그가 이 때 다윗을 찾아온 것은 복구된 다윗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취해진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취해진 행동에는 계획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누구보다도 다윗을 먼저 찾아온 것이요. 둘째, 그가 대중을 거느리고 나아온 것도 다윗을 환영한다는 꾸며진 행동으로 보입니다. 이 때 다윗은 시므이의 환영을 받았고, 또 그를 죽이려는 아비새를 꾸짖었습니다. 그 날은 기뿐 환도의 날이니만큼, 그는 시므이를 향하여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처사는 시므이가 무죄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왕상 2:8-9). 시므이야말로 사울 왕의 잔당으로 다윗의 반란으로 권력이 약해진 통을 타서 정면 공격 자세로 대든 자입니다. 마땅히 교활하고 간사한 시므이는 처벌되어야 할 자입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다윗의 은혜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도 전에는 시므이와 같이 하나님을 대역하던 자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로서 주님의 원대한 은혜 속에서 살지 못하는 현대의 시므이를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시바 시바는 일찌기 사울 왕의 사환이었으며 므비보셋의 종이었습니다. 그가 아들 15명과 20명의 종을 대동하고 요단 강변까지 다윗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다윗 왕의 피난길에 나귀 두 마리에 각종 식물을 싣고 다윗을 찾아 위로하고는 그 기회를 틈타서 자기 상전 므비보셋을 배신하여 기만적 술책으로 구왕실 재산을 착취한 바 있는 시바가 이 순간에는 뻔뻔스럽게 나타나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시바야말로 기회주의자입니다. 전쟁이라는 복잡한 상황을 이용하셔서 오직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시바야말로 상전에 대한 충성심도 없고, 민족에 대한 애착도 없었습니다. 그는 남의 종의 신분으로 아들 15명, 수하에 종을 20명이나 두었으니 그 신분은 종이 아니라 지방장관쯤 되는 행세를 부리며 사는 자였습니다. 남의 채산을 착취하여 호의호식하며 행세하는 모리배이니 시바야말로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인데, 다윗은 일시나마 요나단과의 약속을 파하면서까지 그를 용서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입니다. (3) 므비보셋 두 사람의 악인을 뒤이어 이번에는 선량한 므비보셋이 나타났습니다. 진실한 므비보셋은 다윗이 피난길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남아서 신발을 벗고 수염을 기른채 옷을 빨지 아니하고 망명 중의 왕을 생각하며 몸소 왕의 고난을 체휼하였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피난길에 자기와 동행치 않은 이유를 물었을 매 그는 시바에게 기만 당하여 동행치 못하고 애매히 참소 당하였음을 솔직히 고백하였습니다(25-28절). 시바의 거짓 증언, 그리고 사기가 다 들어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므비보셋이 절름발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바와 같이 나귀에 타려고 했는데 시바가 이를 방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다윗은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므비보셋과 시바의 소유를 분활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왕이 돌아온 것으로 만족하므로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므비보셋이야말로 진실한 신자의 전형입니다. 불구인 그는 왕에 대하여 진린 무방한 자였지만 시바의 간계에 빠져 일시나마 왕의 곁을 떠나게 되고 그의 참소로써 재산마저 몰수 당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러 왕을 향한 일편단심의 충성은 항상 왕과 같이 고락을 체휼하여 다윗 왕의 환도의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물질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명예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왕의 식탁에서 왕을 모신 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자였습니다. (4) 열 명의 후궁(20:3) 이적행위로 처단된 자들을 또 볼 수 있는데, 이는 곧 다윗이 피난시에 예루살렘 궁에 남겨 두었던 열 명의 후궁들입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아히도벨의 진언으로 이들과 동침하여 가장 간악한 죄를 범함으로 그야말로 패역무도한 폭군의 오명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압살롬이 아무리 왕의 자리를 탐내고, 그 용모가 준수하다 할지라도 왕자로서 왕을 농락하고 결국 열 명의 후궁들이 이용물이 되었으니, 수도 탈환 후에는 또한 이적행위로 몰려서 별실에 감금된 채 평생을 생과부로 종신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볼 때 주님의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여하한 경우라도 신앙의 정조를 굳게 수호해야 한다는 진리를 여기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2. 전공자 포상 대상자 바르실래 전후 처리상 또 하나의 불가결의 요소는 전공자에 대한 포상문제입니다. 전쟁 수행과정에서 의례히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자들이 또한 있기 마련입니다. 전공자 포상대상자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였습니다. 80고령의 길르앗의 부호인 바르실래는 자기의 사제를 털어서 군량을 공급하였고, 극진한 접대로써 망명 중의 다윗 왕을 격려하였습니다. 전쟁 중식 후 환도길에 오른 다윗 왕을 전송코자 요단 강변까지 나와서 석별의 정을 나누는 이 동방의 호족인 바르실래에게 다윗은 감격한 어조로 예루살렘에 가서 동거하기를 요청했지만, 그는 고령을 이유로 이를 사절하고 그의 종 김함을 보내면서 자기 대신 잘 돌봐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을 남기고 지나친 왕의 배려에 대해서 정중하게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온 백성들이 모두 요단강을 건널 때 지켜보다가 마지막으로 다윗과 입맞춤으로 작별의 정을 고하고는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바르실래야말로 다윗의 은인이며 또한 다윗 정부의 공로자입니다. 그 후 다윗 왕은 김함을 위하여 거주지를 제공하고 오랫동안 다윗 왕국의 혜택 속에 행복을 누리게 함으로 바르실래와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였습니다.

3. 유다와 이스라엘의 충돌 다윗 왕은 유다 백성들에 의해서만 보호를 받으며 요단강을 건너왔습니다. 그러나 길갈까지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절반이나 왕을 영접하러 나와서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고가 돌아온 것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늦게 왔기 때문에 그들이 왕의 입성을 성대하게 환영하는 우선권을 빼앗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이 중심적인 위치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유다족에게 마음이 치우치는 것을 보고 북방의 충성스러운 백성, 즉 이스라엘로 하여금 질투를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에게 불평을 말했습니다. 41절에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쫓는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넜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북 이스라엘 백성은 왕을 친구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왕의 총애를 독점하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유다 백성들의 답변은 42절에 보면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내느냐 우리가 참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골자적으로 말하면 첫째,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요. 둘째, 유다 사람은 자기 본위로 환심을 얻으려는 자들을 그들이 행한 일로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유다 사람의 공격에 북 이스라엘 사람은 변증하기를. 43절에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남북간에 심한 말다툼이 있었는데 이것은 장차 왕국이 분열되는 흉조가 되었습니다. 훗날 르호보암 왕 때 왕국 분열이 있었는데 그 원인이 먼 역사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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