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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의 만족한 요구 (시 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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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조상이 에덴 낙원을 쓸어버린 이후로 누구를 막론하고 불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입은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만족을 느끼며, 귀는 청아한 음악을 들은 후에야 만족을 느끼며, 코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은 후에야 만족하며, 눈은 아름다운 경치를 본 후에야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심령은 무엇을 얻어야 만족을 얻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금전만 많이 있으면 만족한 생활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황금은 모으면 모을수록 인간의 욕심을 더욱 더 커지고 마음은 가난해져 갑니다. 황금은 우리에게 만족한 생활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도리어 인생에게 불평과 고통을 주는 화살이요 찌르는 가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학문을 배우면 만족하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서적을 산처럼 쌓아놓고 그 속에 나타나있는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상만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지만 학문이 인생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솔로몬 왕은“지혜가 더하면 근심이 더한다”고 말했습니다. 괴테는 또한 “나는 일생 중에 즐겁다고 생각한 시간은 모두 4주간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독일의 자살자 통계표를 본즉 무식한 자는 1000/1이요, 지식 있는 사람은 1000/60이라 하였으니 지식인은 무식자보다 15배나 되었다 합니다. 이 세상의 권세가 기쁨을 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진시왕은 불로초를 구하려 했습니다. 한무제는 승로반으로 이슬을 구했습니다. 최고의 권세를 얻은 이들이 또 다른 것을 구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지위와 권세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다른 무엇을 요구하려 한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인생은 거짓되나 만물은 참되기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가라고도 합니다. 높은 산, 깊은 골짜기, 들, 물, 고운 짚, 밝은 달, 우는 새, 암석 절벽들은 보고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집니다. 기쁨이 있는 자에게는 기쁘게 들려지고 보아지나, 슬픈 자에게는 처량한 소리로 들려집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진리, 선, 미에 대하여 깊은 의미를 느끼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도 “의를 위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산상보훈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사랑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 누군가와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어린이들로부터 노인들까지 모두 그러합니다. 인간은 홀로 살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데서 참된 만족을 느끼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계명대로 사랑을 주고받아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스러운 것이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명랑하여 질까요 그러나 물질세계에나, 마음의 세계에서나, 사랑의 갈급한 심령 세계에서도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에 말한 권세, 금전, 학문, 자연, 만물, 사랑이 다 우리 인생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한다면 무엇이 우리 심령에 참 만족을 줄까요 육은 육이요, 영은 영입니다. 물질은 물질이요, 심령은 심령입니다. 육의 만족은 육에서 얻을 수 있으며, 물질의 만족은 물질에서 얻을 수 있으며, 영의 만족은 영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무형이요 신령한 우리 심령이 어찌 유형한 물질세계에서 만족을 얻겠습니까 절대로 영의 만족은 물질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과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 말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갈급한 영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 만나기 전에는 그 영혼은 만족이 없습니다. 오직 이 갈급함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갈급함을 채워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기다림과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에게 그리운 정이나 기다려지는 대상이 아주 없다면 아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기다림의 몸부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기다리는 자세가 바로 우리들의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느 때 하나님을 뵈올꼬 밤낮으로 내 눈물이 내 음식이 되었구나” 이 얼마나 간절하고 진실한 생명의 울부짖음이여 몸부림인가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은 깊은 사연을 가지고 외로운 산길을 홀로 가는 나그네인 듯싶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눈물이 무엇이며, 생명의 가장 본질적이며, 근본적인 “갈증”이 우리는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인생길을 살아가야 겠습니다. 시인 수주는 그의 수상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꽃 같은 글을 쓰고 싶다. 바람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소근 거리듯, 우는 듯한 글을 산고 싶다.”고 했습니다. 표현과 생명의 몸짓은 다를지 모르나, 우리는 모두가 정신적인 목마름에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의 목마름이 언어의 형식을 빌려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인의 목마름은 시편 42편에 나타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이에게는 그 신앙을 비웃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원수들이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빈정대거나 비꼬아도 그리고 괴로움이 칼로 뼈를 찌르듯 하여도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으로 내가 오히려 찬송할 것이라”고 시편의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의 불굴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에도 절망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은 신앙 뒤에는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잠언 저자의 말대로 “눈은 보기에 만족이 없고, 귀는 듣기에 배부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언제나 공허하며 우리 마음을 채워지지 않을 욕망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과 애통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인의 행복론은 세속적인 행복론과는 앞뒤가 뒤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의 척도와 행복의 표준으로 성서가 말해주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 진리로 받아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모시고 큰 신앙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42편은 우리들의 신앙의 거울이며 역사 안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마음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빌립은 말하기를 “주님이여 내 아버지를 뵈어 주옵소서 그리하면 만족하겠나이다” 했으며, 베드로는 행 3:19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하였고,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오, 주여 나는 당신의 품안에 안기기 전까지는 참 만족과 안식을 얻지 못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만난 이후 시편 23편을 기록하여 인생의 참 만족과 기쁨을 노래하고 기뻐했습니다. 주님을 만나 참 기쁨 얻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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