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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사(容赦)의 덕 (삼하 14: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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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왕은 요압의 청원대로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요압의 인도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다윗은 그를 대면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압살롬에게 대한 다윗의 의분이 풀리지 않은 증거입니다. 다윗의 심정으로 보아 압살롬의 귀국은 시기상조였던 것 같습니다. 이때에 요압은 왕을 위로하기 위하여 압살롬을 데려왔으나 압살롬이 회개하지 않은 채 왕의 주변에 있었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중에 내란을 조성하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압살롬은 예루살렘 성민에게. 칭찬거리가 되었는데 그것은 외모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습니다. 민중은 사람의 외모에 끌리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압살롬은 왕명으로 암논을 죽인 죄를 사면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에 압살롬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지혜와 경건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그토록 독실한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우리는 그의 신앙에 관한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압살롬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압살롬은 용모가 매우 수려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아름다움으로 그에게 필적할만한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25절). 그러나 아름답게 행동한 면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에게 향하여 불만 뿐이요, 상처와 흠 투성이었습니다. 압살롬의 머리털은 매우 많고 아름다웠습니다. 머리 길이나 빛깔이나 아니면 특별히 부드러워서인지 아뭏든 그의 머리털에는 그를 돋보이게 하는 어떤 점이 있었습니다(26절). 그의 머리털에 대한 이런 주목은 나실인의 머리털이 아니라 멋장이의 머리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머리털이 자기에게 부담이 될 정도로 무거워질 때까지 길렀습니다. 그는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머리털을 길렀습니다. 그는 자랑하기 위해서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자기 머리털에 대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는 연말마다 머리털을 깎았습니다. 이는 자기 머리털이 남의 머리털보다 얼마나 월등한가를 과시하기 위해서 무게를 달았는데 무게는 200세겔이었습니다. 교회사가 요세푸스의 말대로 머리털에 기름과 금가루를 뿌리는 것이 그 당시의 유행이었다고 한다면, 머리털의 무게가 이렇게 나가는 것도 믿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자됩니다. 이 아름다운 머리는 그의 교수형 밧줄로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암논을 죽인 압살롬을 용서하고 5년만에 다윗과 압살롬이 다시 만나게 되자 다윗은 압살롬에게 달라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내 아들 압살롬아’ 하고 부자 상봉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왕자 압살롬의 죄악을 용서하고 부자 화친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배우는 진리와 깨닫는 교훈이 많은 중에 용서(容赦)로 오는 덕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1. 용서(容赦)는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신령한 의미로 해석해 보면 우리도 왕자 압살롬이 범죄하여 부왕 다윗에게 쫓겨나 먼 곳에 가서 고생하며 망명의 세월을 보내듯 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인생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품안에서 쫓겨나서 괴로운 세상에서 무궁무진한 고생을 하다가 왕자 압살롬이 요압 장군의 중재로 부왕을 만나서 죄사함 받은 것처럼 중보자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 품안으로 돌아와서 지난날의 죄악에서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권리가 회복되어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간단히 말해서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회개하고 돌아온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해 주시는 용서인 것입니다. 기독교 중심은 예수님이요 예수의 중심은 그가 지신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란 인류의 죄악의 용서는 그리스도교의 진리요 기독교 성림의 근본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란 용서가 없이는 성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 십자가, 구원. 엡 4:32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를 용서하듯 하라”고 했고, 골 3:13에 “누가 뉘게 협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조상의 원죄와 자신의 자범죄로 이미 멸망을 당했을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에 용서의 손길, 즉 십자가의 공로로 살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큰 은혜입니까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잘못 원수 맺은 것 다 용서해주는 사랑의 표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로써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대속과 용서의 사랑이 세리와 창기도, 음행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도, 십자가상의 강도도, 주님을 못 박는 무리들의 죄까지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 용서가 그리스도교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2. 용서(容款)는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주님은 친히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들의 죄악을 용서한 것처럼 형제의 죄악을 서로 용서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베드로가 한 번은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 용서하리이까’ 할 때 예수님은 ‘칠십 번씩 일곱 번’ 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완전히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었는데, 주님의 공로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신 주님이 나에게 형제를 용서하라고 명령하시니 어찌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런 비유로 말했습니다. 한 빚진 사람이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갚을 것이 없어서 애원을 하니 주인이 불쌍히 여겨 사랑으로 탕감하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로 집에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백 달란트 빚진 사람을 만나자 붙잡고 내노라고 하니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한 주인이 이 왕경을 보고 노하여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붙잡고 감옥에 가두고 일만 달란트를 갚기 전에는 결코 놓아주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면서 우리 신자들이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는 말은 죄를 덮어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형제가 내게 잘못할 때 사랑으로 그를 용서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한 인물은 애굽의 요셉이 총리가 된 후 형님들이 자기를 애굽에 판 것을 용서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충신으로 사울왕의 미움을 받을 때 사울에게 복수할 기회가 있었으나 엔게디 굴에서, 삼상 24:4에 십 황무지 하길나산 야영에서 창과 물병만 가져와서 사울의 잘못을 용서했습니다. 저들은 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3. 용서로 오는 덕과 유익 (1) 형제를 용서하므로 나도 주께 용서받습니다.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고 했고, 눅 6:37에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막 11:25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만이 내가 주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산을 향하여 칭찬하면 칭찬이 돌아오고 욕하면 그 욕이 돌아오는 산울림과 같이 내가 남을 용서하여야 나도 용서받는 것입니다. (2) 예배가 응답이 됩니다. 마 5:23-24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고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도 마 6:12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했고, 마 16:19에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형제와 원수를 맺지 말고, 형제를 용서하며, 화목하지 아니하고 드리는 예물은 받지 않으시겠다는 말입니다. 사람 사이에 원수의 담을 쌓은 사람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도 담이 쌓여 막힌 것입니다. (3) 용서하면 더욱 충성하게 됩니다. 딤전 1:12-17에 바울은 죄인 중 괴수인 나를 주님이 용서하심으로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충성함은 죽을 죄인이 용서받음으로 그 사랑에 감격하여 몸바쳐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웅서와 사랑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용서로 사죄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합시다. 이것이 신자요 하나님의 축복받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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