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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긴의 통치 (왕하 23: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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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32절) “여호야김이 그 열조의 모든 행한 일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37절) 이것이 여호아하스와 여호와김 두 왕에 대한 평가입니다. 우리는 이 두 왕에게 내려진 공통된 정죄의 성격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 열조의 모든 행위대로”그들은 악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유전성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갖게 됩니다.

1. 원죄를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원죄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정통 기독교회에서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 죄가 후손들에게 상속되어 왔다고 말합니다. 초대 교회 신학자들인 순교자 유스티누스 이레나이우스, 네르를 리아우스, 오리게네스 등이 이러한 주장을 했고 어거스틴이 이 주장을 교리화했습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인간은 타락하기 전에 죄를 지을 수 없는 능력과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을 함께 가지고 있었는데 타락한 후에는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이 아담의 죄는 전 인류에게 유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교리는 기독교의 정통적인 신앙으로 인정되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교리를 거부하고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보듯이 “그의 열조와 같이”타락된 두 왕의 이야기는 정통 기독교의 원죄론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의 불신앙의 열조와 같은 죄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됨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도덕적인 죄를 범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본성 자체가 타락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에는 모든 열조가 죄를 범한 것과 같은 죄성이 있습니다. 이 죄의 뿌리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열조와 같이 죄인으로 정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타락된 본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이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아담의 죄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우리의 본성이 되었기 때문에 원죄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단지 한 길이 있다면 또 다른 아담 곧 그리스도께 의지하는 길입니다. 그 분의 자손이 되는 길이 바로 우리의 근원적인 죄를 해결하는 길입니다.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롬 6:16)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한 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 6:17)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의 그릇된 삶은 하나님을 떠난데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왔다면 그들의 죄성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죄로부터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만 행했습니다”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죄성에 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주님 보시기에 악만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로 돌아와서 죄사함을 받으십시다. 모든 정죄로부터 구원받으십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1. 죄의 심각한 증가를 보게 됩니다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에게 내려진 평가는 “그들의 열조와 같은 죄”입니다. 그들의 죄악은 그들의 선조보다 경감되거나 완화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모든 열조들의 행한 악들”을 다시금 재현시킬 뿐이었습니다. 죄는 증가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 마디의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다른 여러 거짓말을 해야 하듯이 한 가지 죄가 여러 가지 죄를 끌어들입니다. 그런데 그의 자손 중 라멕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창 5:24)고 자신의 증가된 죄를 자랑하는 뻔뻔한 자였습니다. 죄의 증가를 보여주는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죄의 증가는 그만큼 큰 형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선조들이 죄를 지어도 별탈이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을 후손들은 죄의 핑계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 기간동안 하나님이 어떤 형벌을 내리지 않은 것은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는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지체는 죄의 기회가 아닙니다. 회개의 기회입니다. 여호아하스와 여호와김은 회개했어야 합니다. 그들의 선조가 가던 길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회개의 기회를 버리고 또 다시 범죄했던 것입니다.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였느니라”(벧후 2:3)는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입니다.

3. 전통에 대한 무조건적 위임이 위험을 보게됩니다 전통이라고 해서 반드시 율은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갖가지 전통은 참된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속박하는 일들을 담당했습니다. 그릇된 전통일수록 개혁되어야 합니다.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은 그들의 선조가 걸어온 그릇된 전통을 무조건적으로 숭배했습니다. 그들이 지혜로운 자였다면 그들은 당연히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전통을 세웠을 것입니다. “열조와 같이”라는 말에서 떠나야 했지만 결국 그들은 “열조와 같이”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전통이라고 해서 다 부인될 것은 아닙니다. 옳은 것은 지켜져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좋은 전통도 있었습니다. 바로 요시야 왕과 같은 전통 말입니다. 그들은 요시야의 신앙과 요시야의 행위를 본받아야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처럼 여호와의 마음에 합한 자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귀한 전통을 버리고 옳지 못한 길을 걸었습니다. 참된 전통은 다윗과 요시야와 같은데 있었음에도 그들은 “죄악된 열조와 같이”행동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전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종교개혁의 전통입니다. 말씀 중심, 성경 중심, 기도 중심의 전통입니다. 다른 이것이 교회의 전통이요 개신교의 전통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악된 열조와 같이” 그릇된 길을 가시지 마십시요 “신앙의 열조와 같이” 바른 길을 가십시요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인정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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