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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울이 망한 원인 (삼상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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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사에서 초대 왕 사울에 대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겸손하고도 효성이 지극했던 사울이 일국의 왕에 오름으로써 자기의 일생을 망쳤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그의 최후는 어느 왕보다도 비참한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훌륭하게 시작은 하였지만 비참하게 마친 일이 안타갔습니다. 이같은 비극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40년간의 긴 세월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그 비극의 원인을 찾아 보십시다.

1. 대신(하나님) 관계의 죄로 인한 비극 사울 왕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신, 불의, 불충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체 하였으나 참 믿음은 없었습니다(삼상 10:12). 왕으로서의 40년간 예배 행위가 몇 차례 있었는지 그 특기할만한 기록을 찾아 보면 단 두 차례 뿐입니다. 왕에 오를 때와(삼상 11:15), 블레셋과의 전쟁의 위기에서 드린 것 뿐입니다(삼상 13:8-12). 사울 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여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1) 사울은 교만 죄를 범했습니다. 그가 임금으로 세움 받을 때 임금만이 해야 할 일을 하도록 세움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한계 영역이 결정된 것입니다.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은 왕이 하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사장 사무엘을 시켜서 사울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붓게 하신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도록, 그리고 적군을 물리치는 국방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군이 점전 침공해 올 때 급해진 이 사울 왕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백성들을 모았습니다. 일주일 후에 사무엘 제사장이 오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이 더디고 일주일이 지나자 그는 마음이 황급해지며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자기가 드리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물을 가져오게 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왔습니다. 삼상 13:13에 “ 왕이 망령된 일을 행하였나이다 ” 하고 그는 사무엘에게 책망받았습니다. 그 때 그는 회개하지 않고 끝내 자기 자신을 변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임금으로 세운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휠씬 뛰어나서 세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세운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뜻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서 족하지 않고 제사장까지 겸할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교만이었습니다. 약 4:6에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 고 했습니다. 사울의 일생을 볼 때 처음부터 교만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무리를 향하여 사무엘은 사울 왕을 이스라엘 왕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공포하여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울은 이 말을 들었을 때 두려워 떠는 마음으로 그는 장막 속에 있는 행구 속에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러나 몸집이 크므로 아무리 들어가 숨은들, 쉽게 발견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이 “ 사울이 여기 있습니다 ” 하고 모셔와 왕으로 앉힌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겸손한 사울이 교만하여지고 나중에는 제사장만 해야 될 성역까지 침범해 자기가 다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거역한 죄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지력이 모자란 것도 아니요, 총명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완고한 탓이었습니다. 언제나 내가 옳고, 언제나 내 생각대로 해야 하고, 내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 대신 다윗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내가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사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의 뜻이 있어 하시려는 일을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해서 끝까지 방해를 놓았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에서 유례가 없는 비참한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2. 대인(사람) 관계의 죄로 인한 비극 사울 왕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변을 끝까지 해치려하지 않고 도우려는 분들이 있었건만 이들의 성의와 노력을 귀하게 받지 못하다가 끝내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만고의 충신이요 용장이며 자기 부마(사위)입니다. 이런 다윗을 끝까지 시기와 미움으로 죽이려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자를 무모하게 허비했으며 무죄한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삼상 22:14-19). 사무엘 선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노 사무엘 선지를 우습게 알았습니다. 왕이면 최고이고, 선배도, 선지자도, 하나님도 안중에 없다는 오만불손의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삼상 11:6-7, 13:8-10). 사울 왕이 실수한 것은 질투하여 미워한 죄입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넘어뜨린 다윗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키워야 할 사울이 오히려 그 다윗을 질투하여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 곧 후계자인 줄로 생각하여 그를 아끼고 보호해 주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을 그대로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스스로 창을 던져서 그를 벽에 꽂으려고 했고, 그래도 안되니까 군대를 풀어서 그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다윗을 잡으려고 하다가 굴 속에서 자기 옷만 찢기고 망신만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심으로 사울은 다윗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울은 분노의 칼을 더 갈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 나보다 나은 자가 생기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교회봉사를 할 때에 나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생기면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어지러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후진을 아끼고 키워야 할 지도자가 오히려 자기보다 더 커지려는 후진들을 짓밟으며 미워하는 지도자가 더 많은 탓입니다. 마틴 루터를 키운 존 스타우피츠가 없었다면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성공했을지 의문입니다. 장로교 창시자 캘빈을 키운 월리암 파렐이 제네바에 있었기에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성공한 것입니다.

3. 자기(나) 관계의 죄로 인한 비극 사울 왕은 자기 자신과의 조화를 잃었음으로 항상 불안에 쫓기고 있었습니다(삼상 19:9). 사울 왕은 극기 생활에서 실패자였습니다. 통일 왕국의 초대 임금 자리에는 올랐으나 자기는 다스리지 못한 실패자였습니다. 사울의 비극적인 원인은 바로 자기 중심에서 싹이 돋아난 것입니다. 사울 왕은 양심을 속였습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보다도, 권세보다도, 양심이어야 합니다. 사울은 회개없는 삶을 살다가 자멸하고 만 입니다. 물론 그는 입술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는 말을 전혀 안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사무엘의 질책을 받을 때는 때때로 “내가 범죄했나이다 ” 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삼상 15:24에 “ 내가 범죄했습니다 ” 하고서는 돌아서서 사무엘에게 자기가 절대로 잘못한 것이 없고 백성들이 잘못하였으며 환경이 잘못된 것을 탓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명하시기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말렉을 모조리 멸절시키고 그 전리품 하나라도 그저 두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중에서 좋은 것은 전리품으로 숨겨두고 살찐 양과 소는 다 죽이지 아니하고 숨겨 두었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 내 귀에 들리는 양의 소리와 소의 소리는 어찜이냐 ” 고 말할 때 사울은 “ 내가 욕심이 나서 그랬습니다 ” 하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려고 제일 좋은 것을 남겼나이다 ” 라고 거짓으로 변명했습니다. 사무엘이 책망하자 20절에 “ 나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했으나 다만 백성들이 제사 지내려고 했습니다 ” 하고 백성에게 책임을 전가시켰습니다. 다윗 또한 잘못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신앙의 위대성은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한데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의 위대성도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하고 고백한데 있습니다. 죄를 회개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고 물으실 때 그는 “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 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있는 곳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싹트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자기 자신의 죄를 회개할 줄 모르고 참 회개를 지연시킬 때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길보아산의 비극이 주는 교훈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자성하며 내 자신의 숨은 죄를 그대로 둔 채 하나님 앞에 회개할 줄 모르는 성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울 왕은 인생으로서의 실패자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에 왔는지 조차도 모를 만큼 평생 동안 다윗만을 추격하다가 마친 셈이니 허무한 광자였습니다. 뜻도 보람도 없는 일생을 보냈으니 비극 밖에 달리 무슨 보상이 있겠습니까 확고한 신앙의 철학없이 산다는 것은 사울의 길을 밟을 뿐입니다. 우리는 처음 믿을 때의 기쁨과 감격, 그리고 그 겸손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신앙의 연륜이 더해 갈수록 내 마음이 강팍해지지는 않았는지, 첫사랑을 잊어버리고 냉담한 채 무기력하고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채 그냥 교회만 출입하고 있는 우리가 아닌지,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서 나의 경건이 더 깊어지고 주님을 향한 충성과 사랑이 더욱 더 깊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내 마음 속에 박혀있는 교만, 질투, 변명들의 독소 묻은 화살을 우리가 그대로 감추어 둔 채 빼어내지 않는다면 사울을 찌른 블레셋의 화살이 우리의 심령을 찌를 것입니다. 자신들을 주님 앞에서 솔직하게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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