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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할 일꾼 (눅 1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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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좁은 의미의 전도 활동보다 넓은 의미의 전도 활동을 염두에 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나타나는 칠십인이란 숫자는 유대인에게 하나의 상징적인 숫자로써 포괄성을 띠고 있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민 11:16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감독하고 모세를 돕기 위한 선택된 장로의 수가 칠십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석수도 칠십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칠십 명을 전도자로 선택했다고 하는 것은 어느 한정된 지역을 대상으로 한 복음사업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는 전도자의 윤리와 청중들의 자세에 대하여 중요한 내용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물질적인 것들로 어지럽혀서는 안되고 여장도 가볍게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자기 일에 전념해야 하고 자기 앞에 놓인대로 먹고 보다 더 나은 곳, 보다 더 평안한 숙소를 구하려고 이집 저집 돌아다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4절에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즉 복음전도자는 의식주에 너무 관심갖지 아니해도 복음을 듣는 자가 보급을 해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전도하는 일에만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또 길에서 문안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무의미하게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5-6절에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하였습니다. “평안할지어다.” 이 말은 히브리 말로「샬롬」이라고 하는데 이는 히브리 민족의 인사말입니다. 전도자가 어느 가정에 들어가서 그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을 빌 때 그 집에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그 전도자를 영접하면 그 집에는 평안이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주를 영접하는 자도 없고 그 전도자를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 평안은 전도자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니 항상 전도자는 평안의 인사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7절에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전도자의 생활은 하나님께 맡긴 삶입니다. 따라서 그를 맞는 자의 집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머물 것이고, 또 그가 음식을 대접받는 것은 정당한 보수라는 것입니다. 8-9절의 말씀에는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면 신자들이 볼 때 불경건한 음식이 나와도 거기에 대해서 부담을 갖지 말고 태연하게 대하라는 말입니다. 병자를 고치는 은사도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는 일은 제자들이 선포해야 할 메시지인 것입니다. 10-11절에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 하라”고 했습니다. 복음과 무관한 자에게는 발의 먼지라도 떨어버릴 정도로 무관계이며 전혀 다른 존재임을 공포하는 것입니다. 즉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은 멸시의 마음에서 하는 조롱의 태도가 아니라 본질적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와 거절하는 자와의 사이에는 하늘과 땅, 구원과 멸망, 빛과 암흑과 같은 건널 수 없는 관계입니다. 16절에는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거절하고 내쫓는 자는 예수님에 대해, 또 하나님에 대해 같은 죄를 범하는 죄인인 것입니다. 즉 참 전도자를 받지 않는 자는 예수를 받지 않는 자요. 예수를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받지 않는 자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받지 않는 자는 이제 올 심판을 받을 것이 필연적 사실이므로 한 전도자를 받지 않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전도자를 받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책임을 두 가지로 말한다면 그 하나는 예배드리는 일이요,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책임을 다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증거를 게을리한다고 하면 그것은 기독교인의 사명을 저버린 것입니다. 마 28:19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었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기독교인에게 맡기신 우주적인 사명입니다. 혹 어떤 이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전도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전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부 베드로를 전도자로 부르셨듯이 모든 기독교인을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기독교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개인 전도의 몇 가지 기초적인 지식을 생각해야 합니다. (1) 먼저 전도해야 할 그 사람을 잘 알아야 전도하기 쉽습니다. (2)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3) 그 사람이 기독교인으로서 신앙 생활을 바로 할 수 있도록 힘써지도해야 합니다. (4) 복음을 늘 들려 주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첫째.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둘째.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진정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자에게만 속죄의 보혈의 능력이 나타남을 증거해야만 합니다. (5) 계속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을 얼마나 돌보아야 하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학습 시기까지의 6개월 동안 매주일 데리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학습 시기까지는 어린 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고 내버려두면 어린 아이를 낳고도 돌보지 않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리고 세례받을 때까지 뒤에서 돌봐주어야 합니다. 넘어지면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까지 받으면 완전한 법적인 입교인이 되고 영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한 심령이 얼마나 귀합니까 무엇을 주고 바꿀 수 있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천하보다 귀한 심령이 아닙니까 이런 하나의 심령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신앙의 영웅이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심령을 주님께 인도한 바로 그 사람이 신앙의 영웅자입니다. 천국에서의 일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행한대로 다 상을 받을 것인데 그 상 중에서도 전도상이 제일 큰 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눅 9:17-20절 말씀에 제자들의 전도 결과를 주님께서 들으시고 하신 말씀이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라고 자부합니다. 여러분 모두도 이 전도 운동에 가담해서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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