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의 이적 (요 02:1-12)

첨부 1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는 더 강하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세 례 요한과 사도 요한, 안드레, 빌립, 베드로, 나다나엘 등의 제자들이 이를 증거하였고 2장부터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하였습니다. 본문 요 2:1-11 말씀은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인데 이 표적의 교훈을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혼인잔치에 참예하여 포도주를 만드시었다는 사실 은 절제없는 음주를 장려하기 위한 기적이 아니요, 예수님께서도 혼인을 중요시 여기며 사람들과 함께 기쁨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준수함에 있어서도 4절 말씀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는 말씀처럼 그의 육신의 어머니의 명령도 초월하셨다는 사실은 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성취하는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째, 예수 그리스도의 힘은 무의미한 물로도 포도주로 변화시킵니다. 즉 색의 변화, 맛의 변화, 사용 용도의 변화를 일으키신 분이십니다. 이처 럼 예수님은 인생을 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의 영으로써 거듭난 자는 전혀 일변하여 새로운 의의있는 생애로 돌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네째, 예수님께서는 처음 것보다 나중 것이 더 좋은 결실을 맺도록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강가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는 증거를 받으신 후 다섯 제자를 데리시고 갈릴리 가나라는 곳에 갔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의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가나에 가난한 혼인집에 초대를 받고 갔습니다. 가나는 요단강 기슭에서 가나까지 도보로 약 사흘 걸리는 거리입니다. 나사렛으로부터는 8km 정도 떨어져 도보로 한 시 간 반쯤 떨어져 있는 마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가나에서 두 번 기적을 베푼 것으로 성경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가 본문의 기적이고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기적입니다. 가나의 지형은 북쪽 헤르몬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경치가 미려한 동네이며, 옛날 유명한 선지자 요나의 무덤이 있는 성소로써 여러 참배자들이 모여드는 곳이고 나다나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한 것을 보면 가나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 순박하고 진실했으며, 그들의 생활이 너무 부하지도 않았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은 소박한 곳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곳에 예수님의 이적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예언적 교훈이 다 분히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3절 말씀에 “포도주가 모자란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적과 표적은 어느 때에 행하셨습니까 혼인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에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무엇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졌는지는 모릅니다. 혼인집이 가난해서 많은 것을 준비 못해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도 생각 할 수 있고, 또한 이 혼인집 신랑 신부는 사람을 끄는 인력이 있어 많은 친구가 왔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여기에 포도주를 여러 가지로 해석을 가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성령으로 비유하는 자도 있고 신앙과도 비유하는 자도 있으며 마음의 능력으로 해석, 설교하는 분 등 여러 각도에서 말씀합니다. 여하튼 이 혼인잔치 집에서 노래와 춤과 기쁨과 모든 흥을 돋우어 주는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 때에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이 포도주가 이 혼인집에 모자란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난색을 표명했지만 그는 결국 실행합니다.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는지라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라고 하셨습니다. 6절의 “결레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는 이스라엘의 관습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식사 전후에 손을 씻는 물통이 있습니다. 이런 통은 모두 돌로 만들어진 것들인데 본문의 돌 항아리가 그것입니다. 여기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이스라엘은 보통 그들의 3절기, 즉 유월절, 장막절, 맥추절에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물을 담아놓은 돌 항아리를 입구에 둡니다. 본문은 유대인 절기 규례를 따라 몸을 씻는 돌 항아리 물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물은 마시는 음료수가 아닌 것입니다. 가족이 많으면 규례에 따라 두 세 통 드는 이 돌 항아리가 많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 보통의 항아리에 물을 넣어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결례에 따라 몸을 씻게 하는 성수를 담은 돌 항아리에서 포도주가 된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몸을 씻는 물 자체는 그리 깨끗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돌 항아리 자체도 그리 깨긋치 못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몸을 씻는 피상적인 역할밖에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돌 항아리 속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실 때에 순종하여 넣었더니 색이 곱고, 향기 나고, 맛이 연하고, 용도가 변한 새 포도주가 되었듯이 주님의 말씀의 순종은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돌 항아리와 물의 역할도 주님의 사역에는 필수적입니다. 노아같은 돌 항아리를 통해 그의 아들 셈과 야벳이 축복을 받았고, 사라를 누이라고 변명하기까지 겁약했던 아브라함과 같은 돌 항아리를 통해 이삭이 축복을 받았고, 그 이삭의 돌 항아리를 통해 야곱이 축복을 받았고, 또 간사했던 수단꾼 야곱같은 돌 항 아리의 입술을 통해 요셉과 유다가 축복을 받았으며,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했던 엘리같은 돌 항아리를 통하여 사무엘이 기름 부음 받고, 그 사무엘을 통해 사울과 다윗을 세워 이스라엘의 건국을 했던 역사를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택한 돌 항아리가 아무리 낡았다 해도 돌 항아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포도주가 된 역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종들의 (목사, 장로) 직분이 얼마나 귀한 거룩한 그릇임을 다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7절 말씀에 “아구까지 채우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물을 돌 항아리에 채우라 하시되 아구까지 차기까지는 아무 대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아구까지 채워질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물을 가득히 넘쳐 흐를 때까지 붓지 아니한다면 돌 항아리에는 물의 수평선이 보입니다. 금이 보입니다. 선이 보입니다. 컵에도 물을 가득히 부으면 선이 안보이지만 덜 부을 경우에는 선이 나타납니다. 선이 보인다는 것은 내가 보인 것입니다. 자신의 공로가 보입니다. 선이 보인다는 것은 나는 무엇 무엇을 하는데, 나는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얼마나 있는데라고 하는 교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전자도 물이 반이 있으면 요란한 소리가 들립니다. 너와 나 사이에 비교가 눈에 보입니다. 여기엔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득히 넘쳐 흐르도록, 즉 선이 보이지 않도록 부으라 하십니다. 내 자신이 보이지 않을만큼 채워지지 않으면 예수님은 이제 연회장에 이 포도주를 가지고 가라고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즉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교만이 없어질 때까지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내가 보이지 아니할 때에, 물금이 보이지 아니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물을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9절에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하였습니다. 마시는 자는 다만 그 맛을 아는데 그치고 그것이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떻게 하여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하지만 물을 떠온 자는 이것을 압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같은 십자가를 믿지만 그것을 매어 보지 못한 자는 참 신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결과를 볼 뿐이지 그리스도의 참 믿음의 십자가의 비결은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할 때만 그리스도의 공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실을 음식의 전문가인 연회장은 알 까닭이 없었으나 무식한 하인들은 알았습니다. 영적 지식도 이처럼 박식한 사람에겐 가려져 있고 무식하지만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알려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런 가치없는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우리의 생각이 변하고 생활이 변화되고 활동이 변화되고 복음으로, 성령으로 변화받아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 처음 포도주보다 더 맛이 좋은 포도주로써, 즉 거듭난 자로서 합당한 생활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죄인이 회개하여 새 사람으로 새 포도주가 되면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왜 지금 내놓았느냐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변화 받을 때에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