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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긍지 (고전 01: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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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린도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상업, 교통,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되는 교역지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는 돈이 홍수처럼 밀려 들어왔고 인구는 60만명 중 자유민이 20만, 노예는 40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에는 인간이 맛볼 수 있는 향락과 죄악의 꽃이 피었고 인간의 가장 심각한 타락이 거기 있었습니다. 올림픽 경기를 대항해 행하여졌던 저 유명한 이스미안 검투는 돈과 술을 위하여 피흘리는 살인극을 가장 좋은 오락으로 삼게 되었고 애굽 동방에서 들어온 유사 종교들이 이 지방의 타락을 더 부채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린도 언덕에 아프리 여신의 전당에는 무녀가 무려 1,000여명 있었으며 여기 참배오는 자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무녀들의 몸값으로 들어온 돈으로써 이 전당이 유지되어 나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린도가 부패한 도시였는가를 가히 짐작할만 합니다. 또한 소피스트 에피큐레안 향락 철학자들과 괴변 철학자들이 활개치며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조소와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로서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걸림돌이지만 우리에게는 예수가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1. 예수는 우리의 지혜 헬라는 고대 서양철학의 발상지요 고대문명이 가장 찬란하게 그 광채를 발하던 곳입니다. 여기에서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많은 철학자들이 산출되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했을 때 정면으로 부딪힌 학파는 에피큐레안 쾌락주의 철학과 스토아 학파의 도덕 철학이었습니다. 에피큐레안 학파는 쾌락주의로 알려졌으나 본래부터 저속한 육체의 쾌락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고상한 정신적 세계의 안정을 추구하였으나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타락하여 현세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 잔의 술과 웃음으로 세상을 지내자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에피큐레안들은 쾌락의 길에 행복이 없었으므로 쾌락을 위한 술잔 속에는 눈물과 슬픔이 어리어있었고 그들은 행복을 외부에서 찾으려 하였으나 세상엔 그들을 만족시킬 행복이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에게서만 우리는 우주적 실재이며 영원한 존재인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저 멀리 하늘높이 존재하면서 손가락 하나 달싹 안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벧엘성 밖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자는 야곱을 부르시면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요,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고 찾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생명의 원천이 되며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는 우리의 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의로울 수 없는 죄인입니다. 시편 시인이 말한 것처럼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사람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많은 사람이 의롭다 칭함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의롭다 했고, 모세를 의롭다 했고, 다윗을 의롭다 했고, 욥을 의롭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거짓말한 자요 자기를 위해 애굽 땅에서 그 아내의 정조를 희생하려 했던 자입니다. 모세는 살인한 자요, 욥도 욥기서에 보면 그 마지막에 죄를 자복한 자였고 다윗은 음행한 자였습니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비록 저들이 하늘높은 곳에 올라갔다 할찌라도 죄지은 양심은 저들에게 무서운 선고를 내렸을 것이요, 음부의 깊은 곳에 숨을찌라도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심판의 칼날을 저들에게 내렸을 것입니다. 어떻게 저들이 의롭게 되었습니까 저들이 의를 행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저들을 의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엔 우리가 의롭다 자처할 티끌만한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가 우리의 의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부끄러울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친히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의가 해같이 빛남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3. 예수가 우리의 거룩 구약성경에 거룩하다는 말은 오직 두 가지 경우에만 쓰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에게요 또 하나는 거룩히 구별되어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사람이나 물건에게만 쓰여집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거룩하다는 것은 아무 물건이나 아무 사람에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이라는 말은 가장 기쁜 찬미로써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장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거룩하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방 여신을 섬기는 1,000명의 무녀들과 음란과 방탕으로 지낸 교우들이 많이 있었고 당파를 짓고 서로 다투는 그런 신앙의 교만이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거룩한 초대교회라 칭함은 하나님께서 세상 죄를 용서해 주신 은혜와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들에게 특별히 사도 바울이 권면한 말은 “자랑할 것이 있으면 주님만을 자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4. 예수가 우리의 구속 우리는 신앙의 경주장에서 결승점에 들어가기까지는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고 나가는 순례자에 불과합니다. 은행에 예금이 있는 한 우리는 수표로 예금한 돈을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은 이미 완성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구원의 기쁨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그것은 예수에게서 나옵니다. 예수가 우리의 의가 되시고 구원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모두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내가 남보다 더 부지런하다면 그것도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것, 멸시받는 것,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게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귀하게 택함받는 자라는 긍지를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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