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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라같은 세상 (출 1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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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나가는 현실 앞에는 실로 해결하기 어려운 수많은 난제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의 생활을 끝마치고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의기양양하게 진군하는 이스라엘 60만 대중들은 돌과 같이 굳은 현실 앞에 부딛히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물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사람은 배가 고플 때는 먹어야 하며, 목이 마를 때는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갈증은 굶주림의 고통 만큼 참기 어려운 고통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 가나안을 향해 3일 길이나 행진하였으나 그들은 물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뜨거운 태양 밑에서 3일씩이나 물 없이 지냈으니 그들의 절박한 사정을 능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 곳에서 물을 발견하였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정신없이 달라 붙어서 그 물을 마시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물은 써서 도무지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 이름을 “마라” 라고 불렀습니다. 마라라는 말은 “쓰다”, “괴롭다”, “쓰리다”, “애달프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신만고하여 샘물을 발견하였으나 그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는 물이 되고 보니 백성들의 실망이 컸고 그 실망은 모세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는 출애굽의 감사도 사라지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던 환희에 찬 감사도 사라지고, 이제는 모세에 대하여 왜 우리를 애굽에서 몰고 나와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고 원망까지 하였습니다. 지도자 모세는 이러한 막막한 현실 앞에 직면하자 곧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지시로 한 나무를 던짐으로써 그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서 백성들의 갈증을 면하게 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1. 마라는 어디 있습니까 동양 옛 말에 인생은 고해라고 합니다.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여래는 인생은 생노병사의 고의 순환이라고 설파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물을 구하였으나 그들에게 쓴물(마라)이 나타났던 것처럼, 우리 앞에도 너무도 많은 마라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 룻기에서 마라에 대해서 듣습니다.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락과 나오미가 그곳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모압 지방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그의 남편 엘리멜렉도 죽고 그의 두 아들도 죽고 할 수 없이 고향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고향에 있던 친구들이 그를 환영하면서 “이게 누구냐! 나오미가 아니냐” 하고 반가이 맞이하니 나오미는 말하기를 “나를 나오미(희락)라 하지 말라 도리어 마라(苦)라 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느니라”(룻 1:20)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도 마라요, 인생도 마라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철학자 데칼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했지만, 신학자 킬켈골은 “내가 고통하는 고로 내가 있다.”라는 새로운 명제를 내놓았습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도 각기 쓰라린 고통이 있습니다. 남이 아는 괴로움, 남이 모르는 나만이 아는 괴로움, 안으로 밖으로 우리는 많은 마라에 둘러 쌓여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이 고통에 싸여지는 것이 아니고 이 고통을 이기는 데서 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라의 세상에서 마라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마라가 있는 이유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이 다한 뒤에 기쁨이 온다는 것입니다. 육지 끝에 바다가 있고, 바다 끝에 육지가 있음과 같이 마라는 우리 일생을 성장시키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 연단시키는 것입니다. 히 12:11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에 부딛쳤을 때 원망은 했지만 하나님께서 마라를 단물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일찌기 신학자 슐라이마허는 콜레라가 휩쓸고 간 자기 교구의 신자들을 향하여 설교하기를 “만일에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필요한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버린 자식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마라가 있었으나,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없는 시련을 주시는 것이 아니요, 그 시련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더욱 연단시키고 교육시키고 훈련시켜서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백성을 삼으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 48:10에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쓴물로 단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가나안을 주시기 위하여 광야 40년의 시련의 생활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마련해 놓으시고는 개인이나 민족을 마라를 통하여 연단시켰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중에 낙심 중에 잠긴 분이 계십니까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참고 이기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약 5:11에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마라가 있음은 축복과 은총이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마라와 같은 고난과 시험과 역경에 처하여 있는 분이 있거든 믿음으로 참고 기다리심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3. 마라의 극복 사람이 고통에 처한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지만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고통을 어떻게 처리하며 극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쓴물 마라를 맛보고, 모세에 대해 원망의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사람마다 모세를 향하여 고함을 쳤습니다. 이 때 모세의 심정은 실로 형언할 수 없도록 괴로왔습니다. 물 끓듯이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모세는 자기를 향하여 죽일듯이 덤비는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이 난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기도한 것입니다. 거친 물결을 보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마라의 극복은 바로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시련의 극복과 해결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신앙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 4:13에서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난파선에서 주님만 바라보고 나갈 때 능히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지만 출렁이는 바다 물결을 바라볼 때 물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 7:7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고 주님께서 교훈하셨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변하게 하려고 해도 변화시킬 수 없고 돌파하려해도 돌파할 수 없는 절대적인 상황을 가리켜서 칼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한계상황을 돌파하는 길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신앙과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의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 50:15에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시련을 당하는 분이 계십니까 기도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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