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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른 뼈에 대언하라 (겔 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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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은 비참한 현실을 보았습니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 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겔 37:1-6).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기력도, 생기도 희망도 잃어버린 채 다 멸절된 상태라고 밝혀주셨습니다(겔 37:11).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이 뼈들이 살 것 같으냐고 물으시는 물음에 당황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 37:3) 라고 대답할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더욱 놀라게 된 것은 “이 뼈들 을 향해서 예언을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가령 저들이 이 말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상관 말고 비참한 이 현실 속에 선지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어느덧 전쟁터에서 묻히지 못한 채 죽어 뼈로 남아 뒹구는 많은 뼈들을 보고 탄식한 일이 있었나 봅니다. 그는 그것을 회상하며 민족적 깊은 내성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의 비참한 모습을 보 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뼈들은 아주 말라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솔로몬의 전성시대를 거쳐 국가가 남북으로 나뉘는 비극을 겪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대립을 합니다. 드디어는 절교에까지 이르는 불화가 생깁니다. 이러한 민족의 대립과 극심한 분열, 백성들의 부패, 무궤도한 생활, 이런 것으로 인해 멸망의 징조가 확실해 집니다. 죽어가는 생명이요, 말라빠져 전혀 가망 없는 뼈로 화해가고 있는 것을 에스겔은 보았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뼈를 뼈로 보고 그 뼈에게 대언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이는 생활을 바로 할 때 그 뼈들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무리들은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의 능력과 사명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을 예언합니다. 함부로 평화를 말합니다(렘 28:9). 죄를 보고 죄라고 지적하며 책망할 것을 책망하고 경고할 것을 경고하고 그래서 마른 뼈들이 다시 살게 하는 참 선지자가 있습니다. 참과 거짓이 판명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런 참과, 거짓은 지금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에게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라 했습니다. 예언자는 대언하는 사명뿐입니다. 자기 말이 조금도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나는 이 뼈가 남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사람은 뼈와 살과 힘줄이 합하여 육을 이루고 그 속에 생기가 들어가 사람이 됩니다. 뼈가 남아있다는 것은 “사람의 상”에서 어느 한부분이 남아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완전히 꺼진 등불이 아니요 완전히 꺾어져 부셔진 것이 아니 라 상한 갈대 입니다. 밝혀질 수 있는 심지와 싸매면 일어설 수 있는 부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말라빠진 뼈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라드 부체’라는 화가는 주로 인물화를 그린 사람입니다. “누구를 그렸는지 모르는 것”이 그의 그림 의 특징 이 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닮은 것 같으면서도 누구도 닮지 않은 얼굴, 배경도 없는 연령도 알 수 없는 막연한 한 인간 초점이 흐려져 있어서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입니다. 그는 수 없는 써커스의 삐에르를 그렸습니다. 이것은 얼굴인 것도 아니고 얼굴 아닌 것도 아닌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무의미한 얼굴들입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사람의 얼굴이 그 존재의 의미를 표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1960년 이후의 인간은 누구의 얼굴도 남겨두려 하지 않은 것이 특징 이 되어버렸습니다. 토르소는 인체의 머리 부분과 팔다리를 넣지 않은 몸통만의 흉상입니다. 현대인은 마치 토르소의 미완성에 저항해 낼 힘을 상실해 버린 채 맥없이 순응해 버리고 만 거세자처럼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서로의 얼굴을 숨겨두고 싶어 합니다. 어떤 때는 권력과 조직과 황금의 배후에 숨어버리기도 합니다. 얼굴이 없는 개인들은 그들의 얼굴을 신분증과 바꾸고 구멍 뚫린 카드와 번호판과 상품권과 바꾸어 버린 채 영영 그들의 얼굴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게오르규의 25시의 늦어진 절망의 시간이 종을 치고 있습니다. 존재의 권리 없는 자동차의 피스톤처럼 기술의 사슬에 매어달고 또 매어달려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보고 괴로워하는 시인은 병든 사회를 고발합니다.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어가므로 절망의 파멸 속에 빠져든 현실은 더욱 악화 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구체적인 기계에서 추상적인 컴퓨터의 숫자판으로 바꾸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속 에는 컴퓨토피아를 꿈꾸는 대중들이 살고 있습니다. 컴퓨토피아는 컴퓨터 와 유토피아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은 1970년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말 이기도 합니다. 1970년대 초 타임지의 질문에 대한 미래 학자 ‘허만칸’ 박사의 대답을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컴퓨터는 여러 면에서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컴퓨터는 온화하고 친절하고 정직하고 참을성있고 노하지 않으며 조소와 무관심과 태만을 모르고 악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공정하고 정실에 흐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초점은 인간이 보다 더 성실하게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철학적인 영향력을 어떻게 제기하느냐에 따라서 사태의 진전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결론적 인 내용은 “70년대의 중요 행동은 연구와 관찰과 추리와 믿음이 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에 대한 바르트와 부루너의 논쟁을 재고해 봅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는데 (창 1:26-27, 5:1-3, 9:6) 인류가 타락함으로써 그 상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바르트가 완전상실을 주장하는 한편 부루너는 형상의 일부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불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불씨가 어느 구석에 있습니다. 씨를 싹트게 할 수 있는 마음 밭이 어느 구석에 있습니다. 살을 붙일 수 있는 뼈가 남아 있습니다. 에스겔이 뼈들에게 대언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4절에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계곡 사방에 들리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야 합니다. 암 8:11에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해 사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속히 땅끝까지(행 1:8) 골고루 퍼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흩어진 뼈들을 연결시키는 살이요, 힘줄이요, 피부입니다. 흩어진 오늘의 뼈들을 보십시요. 바벨탑의 죄로 흩어진 사람들 언어도 흩어지고 국경을 그어놓고 우상을 좇아 흩어지는 등 인류역사는 흩어지는 역사였습니다. 동과 서로 사상의 분열이 생기더니 요새는 빈부로 남북의 대립이 생겼습니다. 나라가 두 토막이 나서 싸우고, 교회는 분파, 사회는 분열, 실로 결합되지 못하는 마른 뼈들의 개체가 산재해 있는 계곡입니다. 에스겔은 뼈들에게 대언했습니다. 뼈들이 사방에서 소리 내며 모여들어 연 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 의 말씀의 초대의 권능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납니다. 종과 횡을 연결 하는 십자가의 교차점에서 폭발되는 사랑의 권능이 남과 북, 동과 서를 연 결시킵니다. 칼발트가 역설하지 않았어도 복음은 화해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나 와 그, 너와 나의 화해에서 마른 뼈들, 흩어진 뼈들은 다시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바다를 가르고, 바위에서 샘이 솟고 사막에 꽃이 피 고(사 35:1), 죽은 자가 살며, 새 하늘과 새 땅을(계 21:1) 창조시키는 것 입니다. 에스겔의 대언은 계속됩니다. 뼈들이 연결되고,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생기가 없습니다. 생기가 들어가 큰 군대가 될 때까지 대언은 계속 되어져야 합니다. 육체가 있어 산 것이 아닙니다. 생기가 있어야 사는 것입니다. 생기가 없는 육체는 참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의 진정과 삶과 실제적인 죽음 사이의 차이라는 것은 ‘생기’, ‘영’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비참한 현실의 배후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입에 꿀 같이 달았다(겔 3:3)라고 말했습니다. 에스겔의 고민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내 가 바르게 전할 수 있겠는가“의 실제적인 문제로 집약되었습니다. 바른 예언자가 되는 문제입니다. “뼈들이 살고 못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속한문제였습니다.”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는 일이 존재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는 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후 2:15-16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니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은 위대하였습니다. 절망적인 현실 배후에 하나님의 사랑의 흐름 을 보고 희망을 말했습니다. 이 희망의 바른 증언이 자기의 책임임을 자각 했습니다. 그리고 옳게 때를 놓치지 아니하고 증거했던 그의 신앙적인 자 각과 결단은 우리의 미래상을 조각하려는 현실 교회의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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