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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동에게도 임전의 이유가 있다 (삼상 17: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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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의 전투방법은 양대 진영이 항오를 벌리고 상호 대전한 후 양군의 대표자가 나와서 싸움을 돋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두 대표자의 격투로써 일단 서막전을 벌이고 뒤이어 전 장병들이 접전하는 법인데, 두 대표자의 승부에 따라서 전쟁의 결과는 이미 판가름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번 전쟁은 워낙 적군의 대표자가 거인이라 겁에 질긴 탓인지 골리앗의 도전에 한 사람의 응전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이 진두에 버티고 서서 40일간이나 오만불손하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욕하여도 누구 하나 대항하는 자도 없이 떨고만 있는 판국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일찌기 암몬 족속 침입 당시는 그래도 하나님의 영이 있어 그의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하여 이를 단칼에 무찔러 영광의 승리을 거두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이미 떠난 오늘의 사울은 친히 나가서 싸울만한 용기를 상실한 채 현상을 내걸고 웅전자의 출현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 중 40일만에 나타난 골리앗의 적수가 바로 홍안의 소년인 베들레헴의 목동 다윗이었습니다. 전투에 있어서 장병들의 사기 저하는 패전의 요인으로써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전장에서 군인들의 사기 저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흔히 전투력의 균형을 잃어버린 경우에 사기는 저하되기 마련입니다. 이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보는대로, 원래 병력의 우열이 심한데다가 거인 골리앗의 출현은 이스라엘 전장병의 사기가 완전히 꺾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유독 목장 다윗에게만은 사기가 충천하고 있었음은 그가 보이지 않은 곳에서 힘의 균형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의 신앙의 눈에 비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가 실망에 빠진 사울 왕을 설득시키는 장면에서 자신이 목장에서 양을 움켜가는 사자나 곰같은 맹수를 볼 때 이를 추격하여 그 턱수염을 잡고 처 죽였다고 증언하면서 “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이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 고 한 것을 보면 그의 능력의 출처가 오직 여호와를 믿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람에 의하여 침fir받을 경우를 실예로 들어봐도 엘리사는 도단성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었으나 태연자약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종게하시는 영락없이 죽었다고 공포에 질려 전률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엘리사는 저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즉시 영안이 열려 하늘에서 무수한 불말과 불수레가 자기들을 호위하고 있는 장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사람은 항상 이 때문에 담대한 법입니다(왕하 6:14-19). 다윗의 충천하는 사기는 다윗을 멸시하는 형들을 설득시켰으며, 사울 왕의 냉소적인 비난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이를 감동시켜 드디어는 골리앗의 적수로 왕의 지명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대전에서 만일 목농 다윗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망국의 비극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일대 국난을 당했을 때 목동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나섰던 것입니다. 다윗은 확고부동한 결심을 가지고 용기를 일지 앉았고 그는 형들이 그를 멸시하고 그릇된 생각을 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확고하여 블레셋과 맞서려고 하였던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공적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간혹 협조를 하여 주리라고 기대했던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방해를 받대 반대를 받았다고 하여도 별로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원수들의 위협과, 그리고 친구들의 멸시와 의심을 정면으로 받는다고 하여도 다만 묵묵히 자기가 하고자 하였던 일을 계속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목동이었지만 전쟁에 임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었습니다.

1. 사명 의식이 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으로서의 목양의 사명이 있었지만 국민으로서는 또한 국민의 사명을 인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29절에 “ 내게 어찌 이유가 없으리요 ” 라고 하였습니다. 국민이면 누구나 다 국민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사명이 있지만, 그 사명을 의식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문제는 달라집니다. 사명의식에 철저한 사람은 평시에는 가만 있다가도 위기 존망 지추에는 다윗과 같이 내게 어찌이유가 없으리요 하며 나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베들레헴 촌 한 목동에게도 이유가 있었거늘, 하물며 오늘과 같이 이 사회, 이 교회에 처하여 있는 우리에게 나라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다윗과 같이 “ 나에게 어찌 이유가 없으리요 ” 하고 나서는 사람만이 국가를 재건하고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 필승의 신념과 용기가 있음으로써 “내게 어찌 이유가 없으리요” 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사울 왕이 다윗을 불러왔습니다. 다윗은 왕에게 고하기를 저 골리앗 따위를 인하여 낙담할 것 없습니다. 제가 곧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내가 양을 지키는 목동이지만 사자나 곰이 내 양을 움키면 내가 가서 사자나 곰을 쫓아가서 나를 해하려 하면 사자나 곰을 죽인 일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처럼 사자나 곰의 입에서도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능히 싸울 수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필승신념의 용기에 설복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전쟁에 임하도록 허락했습니다. 다윗은 이유만을 따지는 이론가가 아닙니다. 사명의식과 함께 그 사명을 실천하고 승리의 신념을 가진 책임성 있는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용기와 그 힘은 어디서 왔겠습니까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어떤 전략이나 훌륭한 무기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골리앗에게 음전하는 다윗이 말하기를 “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 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의지하는 믿음, 그것이 다윗의 용기였고, 자신이었고, 승리였습니다.

3. 다윗은 고상한 목적에서 가만 있을 수 없다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형들이 그렇게도 만류하는 것을 물리치고 사자굴 같은 블레셋 진중에 단신으로 뛰어들어 골리앗과 결투한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울왕이 현상을 한 왕의 딸이나 많은 재물이 탐나서가 아니요 어떤 권력을 꿈꾸는 것도 아니요, 명예를 얻으려는 야심도 아니요, 오직 그의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고, 그리고 국가 민족을 위해서였습니다. 다윗이 전쟁에 임하면서 골리앗이게 경고하기를 “ 이스라엘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고 전쟁은 오직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라 ” 고 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것이 다윗의 이유요 목적이었습니다. 다윗의 목적이 이렇게 고상했기 때문에 그가 비록 비천한 목동이었지만 그렇게도 담대했으며 그렇게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나라를 건지는 일도, 또 국가 민족을 위한다는 고상한 목적으로 살고, 고상한 목적으로 분투 노력하는 길 밖에 없는 줄을 압니다. “ 사람이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이 하는 것이라 ” 고 하였습니다. 국가의 난국을 타개하는 목동이 가만히 볼 수만 없는 이유가 있었다면 오늘과 같은 이 시대, 이 난국에 처하여 그 누구에겐들 이유가 없겠습니까 이유가 있다면 우리 각자가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승리할 때까지 분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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