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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행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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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체포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은 바울의 상경을 제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리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을 뿐이지 그렇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는 안된다는 금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시를 곡해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적당하게 구부러뜨려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말하지 않은 것까지 덧붙여 주의 뜻이라고 외람된 말을 하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동지들은 바울에게 위험한 예루살렘 행을 포기하도록 울면서 애원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유혹입니다. 인정과 사랑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하고 아끼는 것이라야 합니다. 바울로 하여긍 전도자의 길을 걷지 못하도록 가이사랴에 붙잡아 두는 것은 결국 그를 실족케 하는 것이므로 이는 바울을 위한 일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인정에 매석 있었다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바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칼에는 강할 수 있어도 눈물에는 약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울면서 매달리는 동지들을 뿌리치고 일어섰습니다.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지나친 고집이라고 함부로 비난할 수 없습니다. 고집과 충성은 다른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교하는 것은 고집이 아니라 충성입니다. 고집을 충성이라 자족하는 것도 문제이겠으나 충성을 고집이라 비난해서도 안됩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일생을 몸바쳐 일한 사람을 꼽는다면 바울을 빼놓을 수 없고 반울은 ”내가 일만가지 일에 부끄럽지 않게 하고자 지금도 담대히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자 한다.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고 하면서 주를 위하여 살다가 그 몸을 주 앞에 제물로 바치신 것입니다.

1. 주 예수를 위한 각오 지금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입니다. 한 번은 두로 섬에서 배가 머물렀을 때에 제자들이 찾아와서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권했지만 바울은 그들과 작별하였고.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짐사 중 한 사람 인 빌립의 집에 유하였을 때에는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수족을 잡아매고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에게 넘기어 주겠으니 가지 말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너희가 어찌 울며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이름 위해 결박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화평하고 좋은 환경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경 중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피의 종교요, 십자가의 종교이기 때문에 핍박 중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세의 위대한 인격은 애굽 바로 궁중의 호화로운 생활에서가 아니라 미디안 광야 사십 년의 생활에서 이루어졌고, 욥이 역경 중에 신앙으로 축복받았다는 사실은 오늘 모든 성도들의 신앙 의 사교가 될 것입니다

2.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한 각오 실천 바울은 두로에 있는 제자들의 만류와 가이사랴의 빌립의 집에 있을 때에 유대에서 온 아가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을 각오를 하였다는 것이니. 예루살렘을 향한 마음은 제자들과 선지자들도 어찌할 수 없는 줄로 알고 막지 못했던 건입니다. 성역에는 각오와 결심이 필요함과 동시에 이같이 실친력이 픽요합니다. 기독교는 고상한 ol상만을 논하는 사람보다 그 이상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헌신하고자 먼저 예수를 마음 가운데 영접하기에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얻기 위해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 그의 바리새주의, 그의 율법. 그의 지식, 그의 세력, 그의 물질, 그의 모든 정욕도 다 배설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의 세속적인 모든 생각까지도 다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더 아름다운 일이므로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만방에 전하고자 힘썼고, 그 결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아시아와 구라파까지 복음을 전하여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정을 이루고 현명하고 아름다운 부인에 아들 딸 잘 낳고 공명·영광 누리고, 많은 재산을 모아 놓고 사는 것이 꿈이지만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주님을 얻고 더 얻어 주님 위해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는 것, 이것을 그의 소원이자 꿈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3.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예수 위해 살고 예수 위해 죽는 성도가 됩시다 먼저 순교자들의 영전에 치하를 드리며 그 거룩한 모습에 경의를 표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복음의 씨요, 교회의 거름이 됩니다. 순교자들의 피 없이 복음이 전파될 수 없고 순교자들의 피없이 교회의 부흥이 없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순교자들의 핏방울이 떨어지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고 순교자들의 피가 떨어지는 곳마다 교회가 설립됩니다. 우리 한국제단에서는 초대교회와 일제 신사참배 반대시절, 그리고 6.25 사변 당시에 많은 순교자들을 냈습니다. 특별히 북한에는 많은 순교자를 헤아릴 수 없이 냈습니다. 우리는 오늘 살아 남았으며 앞날에 순교의 반열에 참여하고자 하여 살든지 죽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순교할 각오가 있을 줄 압니다. 우리도 사명에 충성하여 사도 바울이 받았던 면류관을 함께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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