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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우심 (요 11: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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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 촌에 웬 초라한 장례행렬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상여에 메고 나갔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여기 유대 장례식은 우리 나라 장례풍습과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장례식은 매우 쓸쓸하고 초라한 장례식입니다. 본시 장례식은 상제가 많이 따르고 백관들도 많이 따라야 구경하는 사람들이 복죽음이라느니 상제들이 덜 외롭다느니 하는데 이 장례식의 상여 뒤에는 남자라고는 없고 여인 두 사람만이 따라가는데 창자가 끊어지듯이 울며 따라가니 보는 자로 하여금 마음이 아픈, 그야말로 불쌍한 장례식이었습니다. 이 장례식이 누구의 장례식이냐 하면 바로 나사로의 장례식입니다. 상여에 담겨 가는 시체는 나사로이고 상여 뒤에 애절통절 울면서 따라가는 두 여인은 그의 누이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이 장례식이 끝난지 나흘 되던 날 우리 주님께서 나사로의 가정에 들렀습니다. 이 나사로의 가정과 주님 사이에는 깊은 인연이 맺어져 있었습니다. 우 리 주님은 수난 주간에도 밤마다 나사로의 집에 가서 주무시고 예루살렘 내왕시에도 주님은 나사로의 집에 가셨습니다. 마르다는 그저 우리 주님을 잘 대접하려고 갖은 수고를 다 했으며, 특히 마리아는 일찌기 문둥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매우 값진 순 나드 기름의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고 예수님 머리에다 그 향유를 부은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마리아를 비판한 것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 생활이 온당한 것이 못 되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삼남매는 예수님을 매우 따르고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죽음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동네 사람들이 와서 울었다는 말이나 예수님 자신까지도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여 우셨다는 것을 보면 이 가정에서는 나사로가 꼭 살아야 할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주님이 우신 것은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이 우신 것은 깊은 다른 뜻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신 것은,

1. 죄로 인한 인간의 무상을 슬퍼하신 것입니다 해는 서산에 지고 달은 동쪽 산마루턱에 올라 밤 세계를 비치는 고요한 초경의 밤, 전도에 피로하신 고달본 몸을 겨우 진정하시고 무거운 다리를 겨우 옮기시어 터벅터벅 나사로의 가정에 찾아드실 때 나사로는 신도 신을 여가도 없이 뛰어나가 우리 주님을 반갑게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나사로가 오늘은 벌써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돌 무덤 속에서 사지를 쭉 펴 고 사람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고 날씨는 더워 나사로의 무덤은 나사로의 시신이 썩는 냄새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사람들 이 그 니사로의 집 근처에 모여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침을 뱉으며 ‘아! 인생은 무상하고 불쌍하다. 사람의 마지막 결과가 저 모양이라니…’ 하며 한숨 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말씀하기를 인생이 사는 것은 바람을 잡는 것 같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했으며, 베드로서에는 인생이 사는 것은 풀과 같고 들에 핀 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성서 예레미야 애가서는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 군대에게 멸망하게 될 때 그 비극적인 인생의 사건을 친히 당하고 보면서 기록한 시가서입니다.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바벨론 군대에 잡혀 바벨론 사령관 앞으로 끌려가 그의 목전에서 그 자식들의 목을 칼로 베고 모든 신하들도 죽이고, 그리고 시드기야왕은 두 눈을 빼어 버리고 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옥에서 일생을 보내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화려하고 웅장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적군의 도끼와 철퇴로 난도질 당하고, 모든 보화는 약탈되고, 성전은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렘애 4:10에 “그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어떤 여자들은 자기들의 자녀를 자기 손으로 삶아 먹었다”는 기록까지 있습니다. 참으로 무상한 세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 인생은 허무하다고 나사로의 무덤에 찾아 온 조객들은 일제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자기의 슬픔을 자기 힘으로 제지할 수 없어 뼈가 녹는 울음으로 슬퍼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찾아와 그 슬픔을 같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도 눈물을 흘리며 우셨다고 35절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당한 비극에 예수님께서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동정하시고 함께 울어 주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뜻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울음은 단순한 인간의 감정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요, 범죄라는 그 값에 대한 눈물이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인간의 현실을 보았던 것이지요. 즉 죄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긴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에 대해서 주님은 비통히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범죄의 결과에 대한 인간의 눈물, 한숨, 고통, 원망, 죽음을 생각하시면서 죽음의 사자에게 사로잡힌 나사로가 불쌍해서 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신 이 죄를 미워하신 눈물은 마지막 인생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들도 죄를 미워하는 우리 주님이 흘리셨던 고귀한 눈물을 흘려야 하겠습니다.

2. 불쌍한 가정임으로 우셨습니다 나사로의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삼남매는 주님의 사랑을 받으며, 신앙의 훈련을 받으면서 그날 그날 행복에 넘쳐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꽂 피는 봄, 무더운 여름, 달 밝은 가을, 눈 오는 겨울, 그 어느 시기라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노력하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볼 때 축복 받은 가정이요, 은혜받은 가정이요, 행복한 가정이지만, 인간적으로 생각 할 때 그들의 생활은 고독한 것입니다. 두 누이는 과부인지 처녀인지, 또 나사로는 총각인지 홀아비가 되었는지 모르나 하여튼 세 식구이니 외로운 가정입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유산을 부모에게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나 마르다가 직접 부엌에 나가 일하는 것을 보면 넉넉치 못한 생활임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외로운 중에 서로를 의지하는 삼남매 중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남은 두 자매는 누구를 믿고 살며, 그 슬픈 사정을 누구에게 하소연하겠습니까 달은 밝고 두견새 구슬피 울고 인적은 고요한 밤, 오빠 잃은 두 자매가 방에서 눈물 흘리니 그 누가 봐도 불쌍한 가정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풍습에 따라 나사로의 친구들이 찾아와 풍악을 울리면서 위로하였을 것이나 그 풍악 소리에 위로는 커녕 오빠 친구들의 낮을 대하니 오빠 생각이 더 간절했을 것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오시었으니 두 자매는 뛰어나가 주님의 손목을 체면없이 잡고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비참한 광경을 보시고 우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탄생 시부터 가난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 에서 탄생하시고, 또한 방 한 칸 얻지 못하고 며칠을 지내시다가 헤롯의 칼날을 피하여 새벽 찬 바람에 주님은 흰 누더기에 싸여 가난한 어머니 마리아의 야윈 품에 안겨 애굽으로 피신가신 주님이요, 애굽 피난시 가난한 부모 밑에 헐벗고 굶주린 생활로 불씽히 자라나다가 나사렛에 와서 목수 생활로 지내신 주님이십니다. 삼년 공생애의 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중의 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대로 우리 주님은 삼십 삼년의 인간 지상 생활에 인간의 고통을 다 맛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 걱정있는 사람, 병든 사람 등 그들의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래서 나사로 가정의 사정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서 남편 아브라함에게 소박당한 하갈은 어린 자식 이스마엘과 함께 쫓겨났습니다. 불타는 듯한 뜨거운 광야를 지나는데 마실 물이 없어서 자식이 괴로와 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하여 땅을 치고 통곡하며 슬피 울던 하갈의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슬픈 하갈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생수를 터지게 하여 그 모자의 생명을 구해냈습니다. 주님은 불쌍한 자를 위해서 오시고 불쌍한 자에게 말씀으로 전하시고 위하여 같이 우시고 모든 죄짐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마지막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이처럼 아시고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사람들의 신앙의 부족으로 주님께서는 통분히 여겨 우셨습니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 앞에 전개된 광경을 만일 그들이 주님을 생명의 주로 믿었다 면 이 눈물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그를 우러러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 나 그들은 믿지 못하여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릴 것으로 믿지 못하고 마지막 날 말세의 부활만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못함으로 생명의 주를 옆에 두고도 죽음의 슬픔 속에 잠겨있는 것을 보시고 답 답하셔서 우신 것입니다. 사람은 죽음에 즈음하여 육의 사람은 육의 생각 이 먼저 그들을 지배하는데 반하여 예수님은 그 영이 먼저 역사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나흘이었으나 믿으면 사십일이라도 “주여 믿습니다” 하 는 신앙으로 생명이 부활합니다. 이 신앙이 확신의 신앙이 되어서 주님에 게 기쁨이 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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