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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민과 신앙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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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청년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마음에 풀지 못하는 고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1. 인생에게는 누구나 고민이 있습니다. 물 건너 마을을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면 여러 가지의 고민이 있습니다. 사람 죽은 집, 병들어 누운 집, 가난에 굶주린 집 등이 있습니다. 어느 개인의 집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저런 집에도 고민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집에도 역시 어떤 고민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물질로 인하여 고민합니다. 어떤 이는 자식으로 인하여 고민합니다. 또 어떤 이는 다른 무엇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청년에게는 고민이 더 많습니다. 노인이나 장년들은 자리가 잡혀 있지마는 청년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높으나 현실의 뒷받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상이 높을수록 고민이 더 많습니다.

2. 고민에 대한 해결 방식은 사람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흔히 기분 전환으로 고민을 해결하려 듭니다. 어떤 이는 고민이 일어나면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입니다. 여유가 있는 이면 여행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나 한계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어떤 한 사람이 자기의 고민을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란서 한 유명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병자에게 영국에 어떤 곡예사가 아주 잘하는 곡예 재주를 가졌는데 그 곡예를 늘 보면 병에 매우 좋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내가 그 곡예사(Circus-man)입니다”라고 했다 합니다. 이 말은 타인들 보기에는 고민이 없이 늘 행복하게 사는 것 같지만 그 스스로에게는 털어놓지 못할 고민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의지적으로 고민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고민은 집념에서 오기 때문에 선한 활동을 자꾸 하여 고민이 생기지 않게 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 젊었을 때 학생 시절에 서울에서 하숙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하숙집 주인은 젊은 과부였습니다. 왜 이런 하숙을 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하는 말이 종일 이렇게 일을 하면 밤에 잠이 잘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흔히 고민이 부도덕한 생활에서 오게 되니 정신 수양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해결 없는 이도 있으며 못 믿는 이도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보면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이 못됩니다. 또 하나의 해결의 길은 신앙에 의하는 길입니다. 신앙에 의하여 해결한다면 우습게 여길지 모르나 누구나 그 고민이 절정에 달하게 되면 무언가에 의지하고자 하는 신앙이 생깁니다. 그래서 굿하는 자도 있습니다. 신앙으로 얻는 해결의 성과 여부는 그 대상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그 붙잡는 물건이 무엇이냐 하는데 달려있습니다. 종이 쪽지냐 널판이냐 하는데 달려있습니다.

3. 그리스도에 의하여 얻는 해결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본문의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두가 존경하는 교법사입니다. 그리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두가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민은 출세를 못해서 생기는 고민이 아니고 재산이 없어서 생긴 고민도 아니고 죄책으로 생긴 고민도 아닙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하는 고민입니다. 말하자면 인간들이 가장 최후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살기 위해 갖는 고민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앞에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해서 실망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 집착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는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내 아이를 고쳐주소서”라고 호소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무랐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는 다급해졌습니다. 자기 혀를 깨물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예수께 매어 달렸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내 믿음이 부족함을 도와주소서” 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아이를 고치려는 의도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해야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4. 신앙의 진수는 확신과 해결에 있습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직 이 확신과 해결을 얻지 못하고 고민하는 이가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분들 중에 이런 이가 많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부자 청년의 경우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확신과 해결을 얻겠습니까 이것을 아직 얻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뢰하지 못함은 그리스도가 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과 같이 아직 다급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그런 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좀 더 자신에 대하여 진실해 달라는 것입니다. 푸슈엘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의 대학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 대학 시절에 그는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양심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양심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자기가 양심대로 살아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양심대로 살아보겠다고 하고 살아보니 사흘이 못가서 거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오 하나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율법대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자기 연배 중에 누구보다도 율법대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에 보면 율법대로 살아보니 율법대로 살지 못했음이 발견되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율법대로 행하여 잘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대로 행하지 못하게 되니 율법은 자기를 고발하는 것이 되고 정죄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살리려고 하는 율법이 자기를 죽이는 것이 되었습니다. 율법대로 살려고 할수록 법은 점점 살아나고 자기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려고 하였지만 악이 행해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자기와 악을 행하게 되는 자기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두 가지가 한 몸에 매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그때 로마의 사형 방식의 하나였던 산 자와 죽은 자의 입, 코, 눈, 할 것 없이 한데 비끌어 매서 냄새를 맡게 하면 안 맡으려고 하다가 끝내 죽는 것과 같은 신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주 예수를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기를 해방시켜 주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고민은 사람을 신앙으로 몰아넣습니다. 심한 병에 신음하게 될 때, 사랑하는 이의 사별로, 심한 비애에 젖었을 때, 사업에 실패하여 대책이 막연하여졌을 때, 이때가 바로 신앙의 출발기입니다. 고민은 좋은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고민이 있음을 불행으로만 여기지 맙시다. 최대한도로 고민하십시오. 그 고민이 절정에 달하게 되면 해결이 옵니다.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설교를 들어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이럴 때 큰 효험을 얻게 합니다. 다른 무엇을 붙들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붙들게 합니다.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십시다.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 고민이 신앙의 최고점에 이르는 길로 발전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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