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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꽃과 같은 인생 (욥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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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을 분해하면 유약한 인생, 불결한 인생, 희망없는 인생을 논하고 있습니다.

1. 인생은 유약합니다(1-3절) 인생은 누구나 여인에게서 납니다. 섹스피어가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고 말한 그대로 여인은 유약자입니다. 그러므로 유약자의 몸에서 난 인생 또한 유약합니다. 인생의 수명은 100년 이내입니다. 시 90:10에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2절에도 “인생은 꽃과 같아서 쇠약해지고 그림자와 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1) 인생은 꽃과 같습니다. 인간의 무상과 연약성을 꽃에다 많이 비유했습니다. 시 103:15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니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라고 했고, 사40:6에 “말하는 자의 소리며 가로되 외쳐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이니”라고 했습니다. 약 1:10에 “부한 형체는 자기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들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벧전 1:24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꽃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인생이야말로 가련한 존재입니다. 그러자 성도는 풀의 꽃과 같지 않습니다. 성도는 없어지는 것을 붙들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썩지 않은 것을 위하여 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세상의 일시적 부귀영화를 탐하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2) 인생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욥 8:9에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고 했으며, 시 102:11에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풀의 소잔함 같으니라”고 했고, 시 39:6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림자 같은 세상에서 하나의 실체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간직하고 변치 않은 믿음 가져야 합니다. (3) 사람은 잠간이라고 했습니다. 시 14:1에 사람은 손 넓이 만큼이라고 했습니다. 약 4:14에 인생은 안개와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10절에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불신자들, 철학자, 과학자들의 입장에서 본 죽음관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살리이까” 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유한성을 말합니다. 인생은 죽으면 그만입니다. 칸트는 “죽음 저편을 모른다”고 했고, 공자 선생도 “생전도 모르는데 사후 일을 어찌 알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① 인간은 체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더우기 죽음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②자연 과학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의 영적문제는 과학이 모릅니다. 물질 세계는 과학분야입니다. 사람문제는 이성철학 분야입니다. 하나님 문제는 신앙의 분야입니다. 사망과 부활은 신앙으로만 해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문제를 과학이나 이성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4) 사람은 고난 중에서 살아갑니다. 창 47:8-9에 야곱이 말년에 체험의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먹고 마시면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질병의 고난, 가난의 고난, 정신적인 고민, 가정에서의 고민, 외부로부터 오는 고민, 내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고민 등 많습니다. 이것은 죄로 인한 것이므로 예수 안에 있는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소망 가운데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인생에게서 깨끗함을 구하지 못합니다(4-6절) 4절에서 원죄의 교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 낼 수 있으리이까 했듯이 교리적으로 볼 때 조상들이 죄로 더러워졌는데 우리가 어찌 죄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악은 어렸을 때도, 청년의 때도, 노년 때도 따라 옵니다. 창 8:21에 “이는 사람의 마음에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라고 근본적인 죄악상을 언급합니다. 악은 밖에서도 들어오지만 속에서도 솟아나옵니다. 시51:5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갓난 아이를 무인도에서 키워도 죄를 짓습니다. 고전 15:22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했고, 엡 2:1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원죄를 가지고 나온 인생이 어떻게 자기 수양으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죄를 범치 않은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즉 예수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인생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듯이 더러운 데서 깨끗함으로 스스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롬 3:10에 “의인은 없나니 곧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생에게서 순결을 구한다는 것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구함과 같습니다. 욥은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해 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했습니다. 본문 6절에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로 쉬게 하사 품군같이 그 날을 마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욥은 그들을 번민케 마시고 품군이 일을 마치면 임금을 받고 휴식함 같이 쉬게 하여 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인생이 자기를 깨끗케 하여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나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인생에게 휴식을 달라고 애원한 것입니다.

3. 수목에는 희망이 있으나 인생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비록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어지지 아니하므로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수천 년, 수백년 사는 나무가 수다하지만 인생은 불과 70년 아니면 80년 밖에 못 삽니다. 그래서 옛 말에 인생은 70 고래희라 하지 않습니까 수목은 말라도 다시 살아나고 절단해도 다시 돋아납니다. 그러나 인생은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죽은 자를 불귀객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한 번 누우면 일어나지 못합니다. 유정 인생(有情人生)은 무정 수목에 대해서 자랑할 바가 없습니다. 하물며 노간거재(老幹巨材) 앞에 서서 자기의 위약단명(違約短命)을 부끄러워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요세미데 국림공뭔에 가서 3,000년 됐다는 늙은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처음있을 때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꽂과 같습니다. 아름다우나 유약합니다. 여인에게서 난 인생은 유약합니다. 그 사는 날이 아주 짧습니다. 불과 70년 내지 80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세월 동안도 괴로움 뿐 입니다. 야곱은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 47:9)라고 실토했습니다. 성경은 인생을 연기(시 102:3), 그림자(시 144:4), 호흡(욥 7:7), 안개(약 4:14) 등의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표현은 인생이 유약하고 단기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꽃은 피어 오를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좋다고 꺾어서 화병에 꽂고 감상을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면 시들어집니다. 그러면 이내 내다 버립니다. 인생이란 모두 이와 같습니다. 꽃의 운명과 같습니다. 청년의 때, 장년의 때는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백발이 되고 얼굴에 주름살이 오고 허리가 굽고 육체가 쇠약해지면 버림을 당합니다. 그것이 인생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덧없는 것을 위해 지나치게 악을 행해서는 안되고 욕심을 가져도 아니되는 것입니다. 벧전 1:24-25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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