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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과 그 선택 (창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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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었지만 그 성격과 생활 태도에 있어서 아주 대조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형 에서는 성경이 우락부락하고 야성적이며 대범한 인물임에 비하여, 동생 야곱은 그 성격이 여성처럼 유약하고 그 생활 태도가 매우 영리하고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았고,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입니다. 순전히 인간적인 면에서만 생각한다면 에서는 확실히 야곱보다 활발하고 좋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누구나 호감을 누릴 수 있는 좋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어떤 면에서 솔직하고 정직하여 소심하고 유약하며 교활하고 이기적인 야곱에게 장자의 권리를 빼앗기고 위대한 아브라함의 신앙적 유산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에서는 도리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보잘 것 없는 에돔 족속의 조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주의는 여기에 집중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야곱은 멀리 바라보는 신앙으로 산 삶인 방면에, 에서는 현실적인 순간만을 위해 사는 유물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인간성 여부보다도 그 사람이 표방하고 있는 삶의 이상과 목적 여부가 그 사람의 생애을 결정짓는데 있어서 보다 근복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 아무리 훌륭한 바탕과 좋은 성격과 존경받을 만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삶의 이상과 목표가 천박하고 낮은데 있다고 할 것이면 그는 하잘 것 없는 무가치한 삶이 되고 마는 것이요, 반면에 그 인간성에 다소 부족과 결함이 있다 할지라도 삶의 이상이 고결하고 높은데 목표를 두고 사는 사람이면 마침내 그는 보람있고 축복받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과 에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야곱의 관심과 목적은 하나님을 소유하는데 있었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의 축복을 조상들을 통해 깨달았기에 장자권의 명분을 얻는데 그 전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상과 믿음이 인간적으로 결함이 많고 교활하게 보이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택하신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에서의 경우는 장자의 명분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는 사내답게 계곡 사이를 말을 타고 달려 산 짐승을 사냥하며 잡아온 짐승의 고기를 안주삼아 술을 들이키는 생활 속에서만 만족과 생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육정에 의해 장자의 권리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안일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에서가 사냥에서 배고파 돌아왔을 때 바로 눈앞에서 야곱이 끓이고 있는 붉은 팥죽이 그의 식욕을 못견디게 붇돋우어 놓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그 죽을 좀 달라고 청했습니다. 교묘하고 수단 좋은 야곱이 이 틈을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평생의 희망이던 장자의 명분을 자기에게 넘겨주면 그것을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에서에게는 눈에 보이지도 않은 장자권 따위는 관심이 없는지라 “ 내가 굶어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 하면서 줄 것을 맹세하고 한 그릇의 팥죽을 받아먹었습니다. 에서는 너무나 헐값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겼고, 야곱은 너무나도 쉽게 장자권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2. 에서는 순간적인 욕망 때문에 위대한 가능성을 읽고 말았습니 다.

에서는 장자권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야곱은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에서로 하여금 에돔 족의 족장으로 몰락하게 한 결정적인 약점이요,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눈앞의 실리 때문에 영원한 가치를 상실하였고, 오늘의 배부름을 위해 그토록 욕심내어 먹었기 때문에 보다 행복할 수 있는 내일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옛날 에서와 야곱만이 문제가 아니라 유물적이요 심리적인 풍조가 휩쓸고 있는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붙잡느냐, 그를 배반하고 죄악 된 쾌락에 집착하느냐의 두 갈래의 길에서 부단히 결단하여야 합니다. 마 7:13-14에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고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에돔 족속들이 믿음의 유산을 박차고 에서가 택하였던 팥죽 한 그릇을 택하여 살고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 장자의 명분 ” 이란 피상적으로 보면 당장에 무슨 효험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배고픈 창자를 채워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귀한 것이요, 보이지 않은 것이기에 근본적인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의 참뜻은 아브라함의 축복을 계승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멀리 바라보는 믿음 때문에 야곱은 어떠한 희생의 댓가를 지불하고서도 기어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 잠시 받는 고난의 경한 것이 장차 나타날 찬란한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 11:24에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 고 했습니다. 어찌 모세 뿐이리요, 베드로와 바울도, 폴리갑도, 다미엔도, 리빙스톤도, 슈바이쩌도 모두 팥죽 한 그릇보다 믿음의 길을 택하였으니 이는 저들이 믿음의 유산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이 밭을 산 것과, 바울 선생이 그리스도를 위하여서는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분토와 같이 버렸던 것이 영원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으려면 야곱이 어떠한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장자의 명분을 빼앗으려 했던 그 굳은 믿음과 뜨거운 정열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고, 가룟 유다는 은 30량에 예수님을 팔았거니와 오늘 날의 우리들도 하잘 것 없는 물질이나 허영이나 쾌락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처소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문화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장식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과제요,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생활의 어떤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바치기를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다른 모든 것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자기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참 진리와 생명과 소망이 있음을 굳게 믿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버림을 받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니 우리 지신의 생명까지를 잃어버리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고 이기는 생활을 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개인이나 민족이 사는 길을 삶의 선택의 기로에서 어는 길을 택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 벌레의 눈을 가진 민족은 망하고 새의 눈을 가진 민족은 흥한다 ” 는 말이 있습니다. 백성의 진정한 공복이요 봉사자라는 사명을 망각하고 돈벌이나 감투에만 눈이 어두운 지도자만 있는 나라는 망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당연히 에서의 길을 거부하고 야곱과 같이 믿음의 길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그가 우리의 전부가 되는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이 위대한 장자의 기업을 굳게 잡아 빼앗기지 않는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서는 피 흘리기까지 사양치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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