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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와 아니오 (마 05: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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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맹세에 관한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교훈은 진리의 신성을 보전하며 말의 진실한 태도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은 제 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제 9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지 말라는 뜻도 있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의사를 표시하는 도구입니다. 말이 없으면 사람의 마음도 알 수 없고 생각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말에 의해서 의사가 전달되고 삶을 유지하고 서로 도우며 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입을 주신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음식물을 섭취하기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의 의사와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입은 신성한 것이며 말은 가장 엄숙한 것이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말의 순결을 다음과 같이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허물이 많으나 만일 말에 허물이 없으면 완전한 사람이 되리라.” 또한 엡 4:29에는 “일구이언 쓸데없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말고 오직 덕되는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너희는 다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 이에 지나친 것은 악에서 오는 것이니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쉬운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참된 크리스챤의 생활은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중대한 발언을 할 때는 맹세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별별 맹세를 함부로 하고는 또 별별 궤변으로써 그 맹세를 폐할 뿐만 아니라 종교의 이름으로 거짓을 자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거짓 맹세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랍비들 사이에 논쟁이 끝없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 유대인의 종교생활이란 말로써 말을 배우고, 말로써 말을 변호하는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말 뿐이고 외식스러운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천지를 두고서도 맹세하지 말고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천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하늘은 그의 보좌이며 땅은 그의 발등상이고,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머리털을 희고 검게 하는 사소한 문제도 사실은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천지나, 예루살렘이나, 우리의 머리나, 어느 하나 하나님과 관련되지 알은 것이 없으므로 우리는 거짓 맹세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맹세를 재판소, 결혼식, 부부서약 등에서 하기는 하나 문제는 진실한 말의 태도를 가리킨 줄 압니다. 믿는 사람의 말은 언제나 진실하여야 합니다. 속과 겉이 같아야 합니다. 속으로는 좋으면서 입으로는 싫다, 속으로 나쁘면서 입으로는 좋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치 못합니다. 그래서 예는 예, 아니요는 아니요만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크리스챤은 그 생활에 있어서 아니요의 부정을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부정의 선포는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러 온 문리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오는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 주었느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리고 스스로 너희가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하지 말라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신 말은 유대인의 전통에 대한 아니요의 선언입니다. 이런 선언은 그 시대에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할 부정의 선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은 그 나라의 통치자인 헤롯 왕의 패륜 행위를 보고는 직접 찾아가서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책망함으로 그의 머리는 쟁반 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과거와 현실의 생활에 “아니요”를 선언한 세례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로 오인하여 당신이 그리스도냐고 묻는 무리를 향해서도 아니요, 나는 그긴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선지자, 앞서 간 순교자 등 모든 성도들은 이같이 예에 앞서 아니요의 정신으로 예언자적 책임을 다해 왔습니다. 사회의 불의와 잘못에 대하여 세상이 모두「예」할 때에도 우리 크리스챤은 “아니요”하고 도전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서는 기독교의 교회 자체의 잘못에 대해서도 주저없이 “아니요”를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크리스챤은 자신의 생명의 안전, 직업의 안전, 인심의 안전을 위해 불의와 부패, 불법을 보고서도 아니요의 선언을 주저하고 있어 사회를 더욱 불행한 비극에 빠지게 하는 책임이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성도들이 일시적으로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아니요” 라고 대답해야 할 것을 예로 넘겨 버립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약하기 때문입니다. 굳은 신념이 없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큰 손해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할 때 유대인들의 잘못된 점을 알면서도, 자신의 추상같은 양심의 책망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억누르고 예수를 사형에 처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유대인의 인심을 얻지 못하고는 나라를 다스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내주었습니다. 모든 쥐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를 원합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지만 실제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쥐는 없습니다. 왜 못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목숨을 다치지 않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자니 문제입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은 내가 살자는 것인데 그것은 곧 내가 죽는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많은 교인이 주님의 분부대로 “아니요”를 못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무조건 아니요, 아닙니다, 예를 할 수 있기 위해 아니요라고 한 것입니다. 부정으로 파괴된 빈터 위에 새 집을 지을 수 있는 긍정이 뒤따라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예가 목적이라면 “아니요”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의 사회는 긍정적인 “예” 하는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누가 가장 위대한 인격자입니까 “예”와 “아니요”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양심의 소유자입니다. 누가 가장 비굴한 사람입니까 예와 아니요의 양변의 조화를 상실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와 아니요의 교훈을 다시 한번 배워서 책임성 있는 진실한 말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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