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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들을 감사제물로 바친 한나 (삼상 0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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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걸고 기도하여 얻은 아들 사무엘, 그는 한나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빨리 지나서 어린 사무엘이 젖을 떼게 되었습니다. 경건한 한나, 사람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그는 또 다시 심정의 걱정을 맛봐야 했습니다. 그것은 이제 겨우 젖을 뗀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데리고 실로 성전으로 올라가서 아이를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서원한 일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사를 살펴볼 때 언제이고 자식은 자기의 갈 길을 향하여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낳은 정, 기른 정도 떠나는 아들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부모의 생명을 쏟아붓는 사랑에도 아랑곳 없이 자식들은 어릴 때부터 제멋대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자라면서 부모의 구속을 싫어합니다. 가정을 이루어서는 완전히 떠나고 싶어 합니다. “ 핵가족 ” 이라 하여 부모를 떠나 사는 것을 통례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스톨게 사랑이라고 하는데 아가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아들을 얻은 한나의 기쁨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가 아들에 대한 사랑은 어느 어머니보다 더했을 것입니다. 본문에 “ 젖 때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 라고 매년 가는 성전에도 올라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노년에 얻은 사무엘을 데리고 성전에 나아가 “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릭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로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러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귀한 아들을 서원 기도대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1. 하나님께 받았으니 드립니다. 27절에 “ 이 아이를 구하매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는 기도대로 허락하였으니 ” 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하나님께 구하여 얻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얻기 전에 하나님께 드리기로 맹세하였습니다. 그는 맹세한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비단 한나 뿐 아니라 우리도 자녀를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 자녀를 자기가 낳은 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으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알고 보면 아이의 주인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한나는 기쁘게 그 아이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게 받은 귀한 선물을 하나님께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2. 양육의 하나님께 드립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시고 하나님께서 기르십니다. 부모는 받아 가지고 길러주는 수종자에 불과합니다. 이 의미에서 우리의 가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탁아소에 불과합니다. 아버지는 소장이시고 어머니는 보모입니다. 하나님이 맡긴 사람을 건사하는 곳이 가정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활비를 받아 가지고 기르는 책임 뿐 아니라 어린 아이에 대한 권리 또한 맡긴 주인에게 있는 것이며, 탁아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보육 이상의 요구를 하면 그것은 아이에 대한 이념에서 탈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선물로 받은 자녀를 하나님이 시키는 뜻대로 잘 양육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부모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뜻대로 자녀를 기르기 때문에 자녀에게 편협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자녀를 잘 양육하여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3 . 교육의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은 양욱의 책임자만 되실 뿐 아니라 교육의 책임자도 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교육이 완전한 교육인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의 교육방법에 의지하여 가르칠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대총장이시고 인간은 교육지도자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40년간 애굽의 최고 학술과 왕실의 교육을 받았으되 그 결과 살인이라는 무서운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인간 교육을 버리고 직접 하나님의 교육을 받게 하려고 미디안 신학교로 보내사 또 40년을 교육시켰습니다. 그 교과서는 아주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양을 치는 방법으로써 신앙, 겸손, 인내, 사랑, 충성 등의 신학과를 마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육을 받아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데 역사를 하게 한 것입니다. 인간 교육만 있고 하나님 교육이 없는 인간은 아이에게 칼을 주는 격입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에 영웅들이 이 칼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교육만이 인류에게 희망있는 자를 육성합니다 인간 교육과 하나님 교육의 차이점은 그가 인간 사회에 유익을 주었는지 해독을 주었는지의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교육의 하나님께 드림으로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큰 사사가 된것입니다.

4.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드립니다. 한나는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쓰시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5. 우리는 주께 무엇을 가지고 갈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아니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우리는 그릇된 길에서 방황하거나 죄고 때묻은 심령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희비쌍곡의 틈바구니에 지쳐있는 우리로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있는 그대로 가지고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한나는 현실 그대로 실로 성전에 가지고 들어갔습니 다. (1) 죄짐을 주님께 가져옵시다. 한나가 실로 성전을 찾았을 때, 무자하기 때문에 브닌나에게 당한 수모와 멸시를 가슴에 안고 하나님의 제단을 찾았습니다. 매년 찾는 이 예배의 길이 한나에게는 치욕의 길이요 죽음에 방불한 길이었습니다. 제단을 향해 노여움이나 사기가 없는 깨끗한 손을 드려야 할 브닌나는 죄 보따리를 더욱 크게 만들고만 있었습니다. 한나는 가슴아픈 상한 심령을 가지고주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이에서 알고 모르고 지은 죄짐을 지고 그대로 주 앞에 나가야 합니다. (2) 슬픈 보따리를 주께 가져옵니다. 한나는 슬픈 여자였습니다. 너무나도 슬픈 나머지 술먹은 사람처럼 흔들거리며 입술만 떨리고 말은 못하고 울먹였다고 했습니다. 하마터면 한나는 자식 없다는 개인적 설움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제사(예배)의 의무를 저버릴 뻔 했습니다(말 2 1 13). 한나는 자기의 고민거리를 즉 슬픈 보따리를 자기의 눈물로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왔습니다. 한나는 아들 하나 달라는 그의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한나는 엘리 제사장의 기도를 힘입고 아들을 얻었으니 이가 곧 사무엘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슬픈 문제들을 풀어주시는 위대한 상담자입니다. 마 11:28에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고 하셨습니다. (3) 기쁜 보따리를 가져옵니다. 한나는 아들 사무엘을 세 살쯤 키워서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전에 바치됐습니다. 이번의 걸음은 기쁨과 축복의 길이었습니다. 삼상 1:24에 “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 ” 와 함께 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하여 엘리 제사장에게 가서 아들 사무엘을 드렸습니다(28절).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얻은 것을 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합니다(대상 29:14-26).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들이 항상 부모님에게 실수나 근심만 끼치는 것으로 만족할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성숙한 자녀일수록 부모님에게 기쁨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찬양과 감사와 기도와 봉사와 전도와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바쳐야 합니다. 자식 없는 여자 한나의 슬픔이 절실했듯이 기도로 얻은 아들을 주의 전에 바치게 된 기쁨 또한 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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