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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권위 (눅 19: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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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8에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미움을 받아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순간이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태연히 가르치셨다는 것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한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국자들은 예수님을 그대로 체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던 백성들이 가만히 있기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제사장들의 비위를 거슬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을 잡을 시기, 결정만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개의치 않고 담대히 무리를 향하여 가르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야를 영접치 못하는 무지에 대하여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우셨습니다(눅 19:41-44). 또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내부를 보시고 하나님의 집,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장사하는 소굴, 강도의 굴혈이 된 것을 보시고 진노하시사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눅 19:45-46). 즉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밖에서는 울게 되었고 성전 안에서는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울음과 진노만을 계속하지 않으시고 멸망이 임박한 예루살렘을 위해 가르치시기를 계속하신 것입니다. 몰라서 못하는 자나 그릇 알아서 잘못하는 자나, 알고도 못하는 자에게 가르침은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열심히 가르치셨습니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될 길,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일,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하여 가르쳤던 것입니다. (1)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 예루살렘의 멸망은 성전에서부터의 개조가 없다면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종교가 부패되어져 있는 한 결코 사회는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겔 9:6 말씀에는 “모든 성결은 내 성소로부터 시작하라”고 한 것입니다. (2) 날마다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침이잔 한두 번으로 성과를 거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자만을 할 것도 아니며, 쉽게 낙심을 할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가르쳐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가르침이란 주님에게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거듭될수록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은 점점 극악해져서 예수님을 죽일 흉계를 꾀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으로 성전에서 나오는 이익금을 잃게 되었고, 또 그들은 그들의 외식된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떤 권위였습니까

1.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권위 보통 권위라고 하면 비정상적인 것, 다른 사람과는 다른 무엇으로부터 나오는 권위를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위는 인간의 모든 법대로 사는 평범한 삶에서 나오는 권위였습니다. (1) 주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로마 황제 아우구스도의 명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에 올리기 위해 베들레헴에 가서 나셨고 (2) 결례 날이 되었을 때 법대로 비둘기 한 쌍을 성전에 가지고 갔으며 (3) 다른 아이와 같이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처음으로 올라갔으며 (4) 여섯 동생의 형이요 가정의 책임을 진 큰 아들로서 목수 생활을 했으며 (5)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으며 (6) 세금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쳤으며 (7) 규정대로 안식일을 지키고 (8) 빌라도의 법정이 불의의 법정이었으나 그 법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인간의 법을 지키시는 가운데 탄생하셔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주님께 권위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얼굴은 대단히 평민적인 얼굴이었습니다. 대통령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큰 기대를 걸고 방문한 한 부인이 링컨을 보고서는 “대통령의 얼굴도 별 수 없다”고 중얼거렸습니다. 이 말을 엿들은 링컨은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을 좋아하여 평범한 사람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나도 평범한 사람입니다”라고 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링컨은 소박하고, 겸손하고, 평범하고 충성스럽게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세인은 그를 매우 권위있는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참 권위는 평범한 속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범 속에서의 권위를 발견한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 (마 7:29)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히 넘쳐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평범한 인간의 생활 속에서도 심령을 꿰뚫어 보시고 그 정황을 냉철히 통찰하시고 생동적인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권위는 가시는 곳마다 따르는 무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했던 것입니다.

2. 십자가의 화목주로서의 권위 어릴 때는 아버지의 고함치는 권위를 가정에서 제일 큰 권위로 이해했지만 나이가 차차 들면서부터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 나약한 손, 용서와 눈물어린 기도와 같은 사랑의 권위가 더 큰 비중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병들었을 때 밤새도록 잠을 못 주무시고 간호해 주시는 손, 실수할 때 용서가 앞서고, 실패할 때 위로해 주시는 어머니의 사랑의 권위는 참으로 큽니다. 주님의 권위는 이 어머니의 권위와는 비교가 안되는 사랑의 권위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힘이 있으나 인류 구원과 나의 구원을 위해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입다문 양과 같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으로 이룬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십자가의 사랑 앞에 어떤 인간이라도 고개를 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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