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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의 위로 (호 02: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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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 경위를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인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기의 신랑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부정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진하셔서 다시 그녀를 신부로 맞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구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 노력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부정한 여인을 그 남편 된 하나님께서 다시 찾으시는 것이지, 여인이 남편을 찾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그녀를 다시 광야로 유인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유인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위안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광야는 무인적막한 곳입니다. 인생의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사업의 실패, 명예의 훼손, 부모와의 사별 등으로 인한 고독한 상태가 곧 인생의 사막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생을 그런 곳에 이끌어 내시고는 그 안에서 위안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낙원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홀로 나가 서 있을 때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엘리야는 호렙산 골짜기를 실망과 낙담 가운데서 방황하다가 고요한 가운데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런고로 구원의 제일보는 광야의 시험입니다. 그 곳에서 나의 죄가 보여 지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듣고 그리하여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광야에서 위안만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언제까지나 광야에 버려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체재는 곧 끝나고 그곳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은 포도원을 마련해 주시기로 된 것입니다. 시련을 이 긴 자에 게 광야는 포도원이 되 고, 슬픔은 환희가 되고, 사막은 샤론의 백합화 피는 정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골 골짜기는 희망의 문이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아골 골짜기는 환난의 골짜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골짜기를 변화시켜 희망의 문으로 만드시고 이를 구원받은 백성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의 문에 들어선 자들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쫓는 자에게는 환난이나 질고나 실패, 이 모든 것들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롬8:28). 이스라엘 민족은 아골 골짜기에서 옷을 찢고 재를 쓰며 슬프게 울었으나, 그러나 광야의 시련이 끝난 후에는 그 눈물의 골짜기에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겠다 하십니다. 마치 그 옛날 홍해를 건넌 후 미리암의 지도로 아름다운 곡조를 노래하던 것과 같이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그 기쁜 날 은총의 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내 주님’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내 남편’이라 하심은 더욱 깊은 뜻이 있습니다. 부부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보다 더욱 깊은 법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날부터 하나님과 주종관계를 벗어나 부부관계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십니다. 우리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주인이나 상전이 아니고 신랑이며 우리는 따라서 그리스도의 노예가 아니라 신부인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신자되기 전에는 그리스도는 무서우신 분이요, 감히 접근할 수없는 주인이요, 심판자였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이끌리어 거기서 눈물로 회개한 이 후에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두려운 분은 아니십니다. 다만 우리의 눈이 그를 두려워함은 우리 속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만 제거되면 그 때부터는 기탄없이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아버지라 부르며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모셔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리스도를 남편이라 하는 특권을 얻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종관계를 떠나 부부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 15:15에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평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자연과의 평화도 가져습니다. 하나님과 친한 자는 맹수나 새나 벌레와도 친하게 됩니다. 사 11:6에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같이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곧 자연과의 평화요, 인간과의 평화입니다. 전쟁도 하나님과 화평하면 그칠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평화에 이르는 길은 영구히 찾을 수 없습니다. 전쟁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행위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서로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칼과 활과 전쟁을 물리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친한 관계에선 적개심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의와 공평과 은총과 긍휼,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의의 표현이 공평이요, 은총의 표현은 긍휼입니다. 의와 은총, 이 두 개의 성품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양면이신 것입니다. “그 날에 내가 응하리니……”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도들을 들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응하시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땅에서 내는 산물에 응하고, 하늘을 통하여 하나님께 상달한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연결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하늘과 땅과 땅의 소산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미친다는 말씀입니다. 이리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환란으로 시작하여 복지로 끝납니다. 만일 인간이 고독한 광야에 나가는 것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끝내 이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광야는 괴롭고 고독한 곳이나 우리가 기쁘게 찾아가야 할 곳입니다. 광야의 시련은 곧 기쁨의 첫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 광야에서 회개하고 주님을 남편으로 맞아들일 때 눈물의 계곡은 낙원으로 화하고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평화가 이루어져 인간은 결국 이 땅과 함께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고독한 인생의 사막, 사업의 실패, 부모의 사별, 친구의 배신, 이 모든 괴로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터전인 것입니다. 그 어둠 속에서 가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여러분의 귀를 활짝 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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