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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 문이 열리다 (창 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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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그의 고향인 브엘세바를 떠난 하란 땅으로 쫓겨가던 나그네 길에 대한 기록입니다. 형 에서에게 쫓기어 고향을 떠난 야곱, 유숙할 곳이 없는 나그네의 석양길, 영접해 줄 사람이 없는 광야의 나그네, 동행자가 없는 외로운 나그네, 이런 야곱의 모습에서 우리는 과객같은 인생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1. 인생은 야곱처럼 고향을 상실한 나그네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 내 경우 내가 아는 전부는 나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 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안다면 무엇을 얼마나 알겠습니까 바하는 말하기를 “ 내일의 날씨도 정확하게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 라고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금단의 열매를 먹고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거치른 세상으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부터 인생은 공향 상실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제1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생의 철학과 실존철학이 대두되었는데 염세주의 와 허무주의도 이 때 등장되었습니다. 이런 철학의 흐름은 전쟁에 지치고 고향집을 상실한 인간들의 모습이 마치 안식처를 찾아 헤메는 나그네와 같기에 참된 생, 참된 인간 모습을 찾자는 뜻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마치 나그네가 정든 공향을 사모하듯이 오늘 인간은 누구나 안식할 곳을 찾아 헤메고 있습니다. 프랑스 화가 밀레가 그린 “ 이삭 줍는 여인 ” , “ 만종 ” 은 인생의 고향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 만종 ”이라는 그림을 보면 석양이 노을진 넓은 들판에서 부부가 일을 하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를 듣자 일손을 멈추고 마주 서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부부의 사랑, 노동의 신성, 자연의 신성,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낸 그림으로써 인간들이 찾고 있는 “ 이상향 ” 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향 상실 중에서 오는 나그네의 망향심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2. 인생은 야곱처럼 불안하고 괴로운 시간의 소유자입니다

야곱은 지금 형 에세에게 쫓기는 여행길에 있습니다. 동숙자도 유숙할 곳도 없는 고독한 나그네로서 언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습니다. 손에 가진 것이라고는 막대기 하나뿐이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서의 보내는 시간과,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긴 이 후의 시간은 양은 변함이 없으나 그 질은 완전히 변하고 말았습니다. 에덴동산의 시간이 평화 “ 샬롬 ”과 조화 “코스모스”의 시간이라면 범죄 후의 시간은 크로노소적 무질서의 시간이었습니다. 크로노스적 시간은 일시적이요, 일회적이요, 한 번 지나가 버리면 반복이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삶이 불안하고 외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남녀가 결혼식을 마치고 비행기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안 바로 옆 좌석에는 한 여인이 남편의 병사 소식을 듣고 울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다같은 시간, 다같은 공간이지만 신혼부부의 시간은 무척 즐겁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르지만, 반면 흐느껴 울고 있는 여인의 시간은 무척 지루하고 괴로울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야곱의 신간은 희망의 시간, 평화의 시간이 아니라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불안한 시간이었습니다. 야곱은 말년에 자기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고백하기를 “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 이나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마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 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시간에 쫓기면서 살기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다가 때가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나그네들입니다.

3. 그러므로 인생은 야곱처럼 하늘 문이 열린 곳 “ 벧엘 ”에 머물 러야합니다

야곱은 괴로운 광야 길을 걷다가 해가 저물어서 더 갈 수 없게 되자 넓은 들판에서 돌을 베개하고 잠들게 되었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했습니다. 야곱이 아침 일찍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운 후 그곳 이름을 벧엘 “ 하나님의 집 ” 이라 했습니다. 벧엘은 하늘 문이 열린 것입니다. 모든 집, 모든 성은 문으로 통합니다. 문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통하는 관문입니다. 계 3:20에 “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했습니다. 여기에 문은 “ 나 ”와 “ 너 ”의 두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 우리의 마음 문이 열리고, 반면 우리가 문을 두드릴 때 예수님의 마음 문이 열려야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서로의 마음 문이 굳게 닫혀 있을 때 거기에는 대화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올라오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으며, 또 하늘에서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기 전,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복하여 하나님의 영광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시고 말하기를 “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 고 했습니다. 하늘 문이 열렸다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교통의 길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 하늘 문은 하나님 편에서 열어주신 것이지 야곱 자신이 연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이지, 야곱이 하나님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계시 종교의 본질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 문이 열림과 동시 하늘 문이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형통하는 관계가 형성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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