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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막 1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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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며, 무엇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1. 먼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더라는 식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이해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마 16:16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한번 손을 가슴에 얹고 솔직하게 이 물음에 대해 나의 대답이 무엇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 대답이 왜곡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이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주님은 그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내가 이 반석(베드로)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구교와 신교와의 큰 해석의 차이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구교에서는 이 반석을 베드로의 인격으로 보고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요 주님은 교회의 주권을 그에게 맡기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대 교황은 교회의 주권을 맡은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교에서는 이 반석이 베드로의 인격이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인격은 주님이 십자가를 예언하셨을 때에 말리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들었으나 베드로의 신앙고백 진리는 영원불변한 고백이기에 교회는 그 베드로의 고백 위에 세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면서 이런 고백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며, 지금이라도 바른 신앙고백을 가지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고백하는 무리를 교회라고 신교는 부릅니다. 교회의 고유성은 세상의 어떤 권력이나 불의가 빼앗을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 나라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신앙고백을 하게 하는 힘은 나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얼핏 생각하면 나의 선택이나 나의 결단에 의해 되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할 때 그들의 일터, 휴식처를 찾아가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세관에서 마태를 부르시고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의 생각, 선택에 앞서서 주님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교회 나오는 동기를 살펴보면 친구를 만나기 위해, 찬양을 즐기기 위해 나오는 분도 있고 그외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는 힘은 그런 힘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시고 끌어 주시는 손길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이 없다면 우리는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2. 가진 것 모든 것을 팔아 이웃에게 나눠주고 와서 나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성경에 기록된 한 부자 청년처럼 주님 앞에 나올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가진 재물, 재능, 경험, 지식, 사회적 지위, 선한 삶 등을 주를 따르는 것의 자격을 갖추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 자랑스러운 것을 버려야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주장하고 그가 나의 선장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하나님은 내 속에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 나의 사고방식이 되고 나의 생활양식이 되며 그리스도인의 생의 자세와 생활철학이 나의 삶의 자세와 철학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고전 15:31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만도, 정욕도, 질투도, 탐심도, 미움도, 혈기도 죽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는 주님을 따를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극기의 뜻입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이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3.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단순히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것 이상으로 자기 삶의 중심에다가 자기 자신을 두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나를 위해서 했고 헌금을 하되 나를 위해 했으며 전도를 하되 나를 위해 했지만 이제부터는 주님을 위해 하는 삶을 말합니다.

4.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을 주저하시는 분이 계시면 진정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증거입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는 영광과 승리의 상징이기보다 고난과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십자가가 고통스럽다고 하지만 교회와 사회에 있어서 사랑의 짐 십자가를 질줄 알아야 합니다. 화해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난과 희생을 요구하는 길이요 모욕과 핍박을 감수해야 하는 길입니다. 각자에게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세 종류의 십자가가 있다고 봅니다. (1) 삶에서 오는 고통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마 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석가는 인간의 대표적인 삶의 고통을 생사병노, 즉 나고 죽고 병들고 늙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삶의 고통은 누구도 예외는 아닙니다. (2)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딤후 3:12에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고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3) 그리스도처럼 남을 위해 지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자원한 십자가입니다. 갈 6:2에서 바울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했듯이 그리스도인의 매력이나 생명력은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현대인은 남의 십자가를 져 주는데 인색합니다. 남의 십자가를 져 줄만큼 순진하거나 어리석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신 것은 역설입니다. 우리가 이 역설적인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한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없고 기독교의 신비한 진리를 결코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5.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따른다는 말씀은 주님과 동거 동락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입니다. 모든 고통과 핍박이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도 같이 따라가야 합니다. 마침내 골고다 언덕의 해골 골짜기까지 따라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영생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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