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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술과 새 부대 (눅 05: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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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해의 온갖 시름을 다 뒤로 돌려보내고 희망과 포부를 안고 새해를 맞이하는 날입니다. 새것을 좋아하는 인생이기에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도 항상 새해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상정입니다. 새옷을 좋아하고, 새책을 좋아하고, 새로 만든 물건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도 새 사람을 좋아하고, 새로운 학설을 좋아하며,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심리현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이 한 해가 우리에게 있어서 새로움을 안겨주는 새로운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1. 새 술와 새 부대는 새 신앙의 상징입니다 우리에게 항상 중요한 것은 어떤 새로운 것이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새로운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눅 5:38에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뜻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다른 것은 몰라도 포도주만은 새로 담은 것보다는 오래된 것일수록 더 맛이 좋습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는 발효 중에 있기 때문에 낡은 부대에 넣어 두면 그 강한 발효의 힘에 의하여 부대가 터져 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에 튼튼한 새 부대에 담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비유로 말씀하셨겠습니까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완전히 타락한 인간으로 낙인이 찍혀버린 세리 마태가 주님의 초대를 받아 제자로서 부름받았을 때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그는 많은 돈을 들여서 주님과 그 제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며 성대하게 대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는 마태의 동료인 세리 친구들도 많이 초대되어 자리를 같이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더러운 악당의 무리인 세리들의 초대에 응해서 그 자리에 같이 앉아 음식을 먹고 담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이 어처구니없는 주의 행동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더우기 유대인의 신성과 율법의 기록을 생명과 같이 귀중히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비록 자기들과 동등한 종교는 아니라 할지라도 세리와 담화하는 것은 신성과 율법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지 그 잔칫집에 친히 찾아가서 “당신들은 왜 이런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 하십니까” 했던 것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산으로 가야 하는 것처럼,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종교가 지닌 본질적인 사명이라고 한다면, 종교는 마땅히 죄인들의 세계로 뛰어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론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부당한 비난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 하고 진정한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똑똑히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타락했고 비뚤어진 양심을 지닌 바리새인이라 할지라도 진리를 진리대로 말씀하는 데는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새 술과 새 부대는 항상 형식주의를 배격합니다 부질없는 힐난에 답변하신 주님에게 또 다른 시비가 걸려 왔습니다. “왜 당신들의 제자들은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 하고 그들은 금식 문제를 가지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 교인들은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자주 금식기도를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도무지 금식을 하려고 하지를 않으니 잘못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의 본질이 금식에 있는줄 알았습니다. 금식이 유대 종교에 있어서 하나의 규례가 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레 16:29-31의 말씀대로 대속죄일에는 여호와의 은총에 감격하여 하루를 고행의 날로 지키라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금식일을 제정하고 일년 가운데 하루는 반드시 금식을 하는 관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는 일년에 네 번, 즉 ①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날 ② 성전이 허물어지던 날 ③ 그달랴 선지자가 살해되던 날 ④ 포위를 당하던 날에 자기 민족의 치욕을 생각하면서 금식하던 것이 어느덧 유대인 사회의 관습으로 굳어졌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금식은 삼상 31:31에 죽은 자를 위해 애통할 때, 삼상 20:26에는 낙심이 되고 마음에 근심이 있을 때, 신 9:18에는 어떤 죄를 회개할 때에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인에게 있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4:2-16과 골 2:16-21에 말씀하시기를 금식은 신자 개인이 자기에게 어떤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할 일이지, 제도화하는 것은 오히려 금식의 참뜻을 망각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너무 열심이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금식의 의의를 넘어서서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을 강요했으며, 그것을 자신들의 자랑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비성서적이곤 인위적인 제도를 만들어 형제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무기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그릇된 종교적 규례를 가지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비난했을 때,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새 술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새로운 종교, 즉 십자가의 종교를 말합니다. 죄인들과는 전혀 상종도 할 수 없다는 닫혀진 마음의 소유자들, 금식을 하지 않으면 종교인이 될 수 없다는 형식주의자 바리새인들, 회칠한 무덤처럼 속에는 온갖 더러운 시기와 질투와 증오의 독소들을 가득히 품고 있으면서도 거룩한 옷을 걸치고 다니는 타락한 종교인들, 이들이야말로 낡은 포도주요, 낡은 가죽 부대인 것입니다. 웅장하고 화려하게 장식한 성전 안에서 제사드리는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짐을 자꾸 지우고, 자신들은 호화와 사치를 누리며 살고, 성전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 아니라 장사하는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이요, 천국문을 가로막는 사탄의 화신이요,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미는 뱀들이요, 독사의 자식인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무리는 무식하고, 약하고, 무명하고, 죄많은 죄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새 포도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들이 바로 새 가죽부대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항상 새로운 것입니다. 새 술처럼 발효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새 술이 들어가는 곳에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 이 신앙이 잘못하면 우리의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늘 반성해야 합니다. 나만이 완성된 종교인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는 일만이 종교인으로서의 완전한 행위라고 너무 자만해서도 안됩니다. 남이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고 가볍게 판단하는 속단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남의 믿음이 약함을 보고 함부로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우리는 다른 그 어떤 사람보다도 나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인 줄 알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만 담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만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담겨질 것이며, 이러한 사람들로 모여진 교회나 사치만이 새 술처럼 아름답고, 참신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임할 것입니다. 주님은 낡은 가죽부대 속에는 새 술을 담아둘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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