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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택과 소명 (갈 0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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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자랑은 새벽기도회에 있습니다. 사실 매일의 생활에 육신적으로 피로하지만 단잠을 깨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 교회의 본당을 꽉 채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은 큰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시간에는 지난 번 상고하였던 말씀을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 생각한 말씀 중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는 바울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적으로 복음주의자요 전적으로 하나님주의자였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가감이 전혀 없는 복음 그대로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말한다 하여도 그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까지 잘라 말할 정도로 그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두철미 복음을 사수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종종 순간순간 유혹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청중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그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충동을 받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을 사람들이 기뻐하든, 그렇지 않든 열심히 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 6:14에서 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확고한 기본자세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려는 사도 바울은 사람에게서 인기나 얻고 환심을 사려고 하는 마음은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었지 사람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교회의 일꾼인 교역자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역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지, 사람에게 환심이나 사려고 하는 사람의 종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복음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1-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계시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안한 메시지가 아니라 바로 주님에게서 기원된 것이라는 겁니다. 13-14절까지에는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심하기 전 바울은 유대교 전통에 광적이었고 광신자였습니다. 유대교를 위해 전심을 다해 헌신한 반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전심으로 핍박했습니다. 도저히 회심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완전히 180도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15절과 16절은 사도 바울의 회심 당시를 잘 말해줍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본문에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의 아들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사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서 선택은 곧 예정을 의미합니다. 엡 1:4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어떤 조건을 전제 하지 아니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자유의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선행은 선택의 결실이지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떠한 인간이라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 15: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롬 9:16에는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선택의 교리는 바울의 사상이요 어거스틴의 사상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체계화시킨 이는 칼빈입니다. 소명과 선택은 차이가 있습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숨은 은사요 소명은 선택된 인간에게 알려져서 그 응답을 구하는, 나타난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나 소명에는 인간의 자유적 거부나 수락이 허용될 수 없습니다. 이는 무조건적 선택이요 불가항력적 은혜인 것입니다. 고로 선택과 소명에 인간적 조건은 아무것도 필요없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독자적 행위입니다. 만일 인간의 조건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시면 우리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고 거룩하게 쓰일 수 있는 자격도 없습니다. 소명에는 절대적인 복종과 응답이 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받을 때 “너는 아비 본토, 친척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경우에는 출 3:10에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의 경우에는 사 6:8-9에서 “내가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렘 1:4-5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또한 부르셨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전능자 하나님의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우리는 이 거국한 잔치에 참예한 자이니 성결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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