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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라합이 주는 교훈 (수 0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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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두 정탐군을 여리고 성으로 보냈습니다. 두 정탐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여리고 성이 공포에 싸여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라는 속담이 있거니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일, 애굽에서 나타내신 일 등의 소문들이 벌써 가나안인에게 골고루 퍼진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누구보다도 소문이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어 안 것 입니다. 라합이 두 정탐군에게 토로한 것은 당시 가나안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표적 여론이었습니다.

1. 라합이 두 정탐군에게 알려준 여리고 상황 (1) 이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는 것을 아노라 여호와께서 이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는 것을 안다는 보고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에게 살 땅과 경계선을 정해 주십니다(행 17:24-26). 그런데 여리고 성은 가나안 주민의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 선민이 살 땅이라는 것을 여리고 성민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심히 두려워하고 마음이 녹았다는 보고입니다. 가나안인은 토착민으로 살 근거가 확실하였고 든든한 사람들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에서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문만 들어도 심히 두려워하고 마음이 녹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 누구나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한 두 사람에 국한한 것이 아니요 “이 땅 백성의” 간담이 녹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시기 때문입니다. 벌써 저들은 떨고 있습니다. 두 정탐군은 여리고 성 사람들의 상태를 보러 왔다가 첫 정탐에 성공하여 이 정보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원칙적인 일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 마귀는 언제나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요 16:33에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3) 청하노니 우리가 생명으로 너희를 지켰으니 우리 생명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정신 잃은 여리고 성 사람 중에, 라합만은 오직 신앙으로, 감히 두 정탐군에게 소청을 했습니다. 우리가 그대를 선대했으니 우리 가족 생명을 구원해 주기를 청원한 것입니다. 정탐군은 그렇게 맹세를 했습니다.

2. 라합은 위대한 눈을 가졌습니다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상천하지의 하나님인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눈이 있습니다. (1) 육신의 눈입니다. (2) 자각의 눈입니다. (3) 정신의 눈입니다. (4) 인간 실존의 눈으로 인간으로서 그 존재를 긍정될 때 즐거워하고 그 존재가 짓밟힐 때 반항하는 눈입니다. (5) 심령의 눈입니다. 영원의 세계,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라합이 가졌던 심령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3. 라합이 이 위대한 눈을 가지고 무엇을 보았습니까 (1) 라합은 사람을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기생을 직업으로 하는 라합의 집에는 사내들이 무상 출입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 같이 주색잡기에 나날을 보내는 자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석양 무렵에 찾아온 두 사내만은 좀 다르게 보였습니다. 조금 후에 여리고 병사들이 이스라엘 정탐군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두 사람을 지붕 위에 삼대 속에 미리 숨겨 두고 그들에게서 건져 주었습니다. 그의 정확한 판단과 긴밀한 행동은 족히 칭찬을 받을만 합니다. 선민이라는 유대인들도 성자 예수를 못 알아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거늘, 일개 이방의 기녀가 어찌 이렇게 사람을 알아보게 되었든가요 우리는 너무 사람을 볼 줄 모릅니다. 외모로만 사람을 취급하다가 실패를 거듭합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부럽습니다. 라합은 정탐군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계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여리고는 이 백성과 싸워서 이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진정한 관계를 맺고 도와주었습니다. 여러분은 라합과 같이 사람을 바로 볼 줄 아는 눈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 라합은 역사를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라합은 그의 집을 출입하는 뭇사내들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민족이라는 것을 익히 들었습니다. 아무도 이스라엘 백성의 일을 방해할 수 없음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드디어 라합은 두 정탐군에게 자신의 소견을 피력하고 그들을 위한 협조자가 되기를 약속했습니다. 역사를 볼 줄 아는 그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분명히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역사가 승리함을 알았습니다. 역사의식은 사람이 위기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바른 태도를 갖게 합니다. 오늘날 기술문명은 토끼처럼 뛰지만 도덕 문명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가 말했듯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자연적 물질적 위기가 아니라 도덕적 영적 위기입니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과 생명이 움직여 나아가며 이루어집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정신과 혼이 부여됩니다. 여기서 이 부단한 움직임이 신에게 접근하느냐, 혹은 안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희망과 절망이 형성되고 의미와 무의미가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사건 뒤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4. 라합은 하나님을 보는 눈을 소유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여리고의 신들을 모두 뭉쳐도 당해 낼 수 없는 신임을 알았습니다. 아니 하나님만이 유일신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라합은 하나님을 신봉했고 하나님 편에 가담했습니다. 앗수르의 산헤림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을 때 히스기야 왕은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무슨 이유인지 앗수르의 18만 5천명의 대군이 하루 저녁에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존 번연은 복음 전파하다가 감옥에서 12년을 갇혀 있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거기서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본다함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봄은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하늘을 동경하는 심정입니다. 기도하는 경건한 모습입니다. 시 123편에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는 기도는 얼마나 희망에 넘치는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라합의 눈이 하나님을 향했듯이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로 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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