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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시대와 사명 (왕하 0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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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했는데, 자기의 욕심으로 구한 것이 아니며 어떤 개인적인 명예를 위해서 구한 것도 아닙니다. 엘리사는 사명의 중대함을 느끼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구한 것이었습니다. 엘리사의 시대는 비상시대였습니다. 이와 같은 비상시국에서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보통의 능력을 가지고는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비상시국에는 무엇이나 갑절이 요구됩니다. 전시와 평화시를 비교해 볼 때 사람도 식량도 비상시에는 갑절로 요구됩니다. 전시에는 일선에 나가서 싸우기도 하고 후방에서는 군수물자를 제조하여 공급도 해야 하며 농사도 지어야 하니 인원도 갑절이 요구됩니다. 이와같이 현시대도 비상시라고 할 수 있으므로 우리의 영력도 갑절이 있어야 감당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상시에 살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첫째,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비상시국에 살고 있습니다. 니체, 싸르트르, 하이덱거, 부비같은 사람들이 사신신학(死神神學)을 부르짓고 있는가 하면, 이단과 사설로 인하여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하고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비상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도덕적으로 비상시국에 살고 있습니다. 예의가 붕괴되어 가고 있고, 성도덕의 문란, 상황윤리의 대두 등으로 인간의 근본적인 도의가 뒤흔들리며 인간이 동물 이하로 떨어지는 그러한 위험한 비상시에 살고 있습니다. 세째, 과학적인 비상시에 살고 있습니다. 과학문명이 절정에 이르러서 사람이 전자 두뇌를 만들어 낸 것은 인간이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은 현상이나 비슷한 것입니다. 핵무기는 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유사시에 사용되는 날이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살아 남을 수 없는 위험한 지경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예술적인 비상국시에 살고 있습니다. 예술의 전환기라고나 할까요 음악을 예로 든다면, 옛날에는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무엇인가 건설적인 것을 구상하여 내도록 사람에게 힘을 주고 감화를 주었는데 요새 유행되는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동시켜 놓고 있으니 예술적인 비상시며, 예술의 감상의 표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초비상시국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신앙을 가지고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엘리사처럼 갑절을 구하여야 하며, 갑절로 받아야겠습니다.

1. 그는 끝까지 따라 갔습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여리고로 그리고 요단까지 따라 갔습니다. 인본주의적인 선지 학교 생도들의 희롱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를 끝까지 따른 엘리사였습니다. 8절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가에 섰는데,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는 놀라운 사실을 엘리사가 보았고 큰 은혜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영생하시는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하는 베드로의 결심처럼 우리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변함없이 주님을 따라야겠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딸의 병을 고쳐주기를 구하였을 때도 예수님의 시험을 이기고 끝까지 “개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며 구할 때에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시고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오순절에 제자들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믿고 끝까지 구했을 때에 그들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실 때까지 단념하지 말고 끝까지 하므로 갑절로 받을 것을 확신하여야겠습니다.

2. 엘리사는 옷을 찢었습니다 엘리사는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었습니다. 옷은 체면을 유지하는 것이므로 이를 찢었다고 함은 자기 체면을 돌보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으나 자기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뽕나무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겠노라”하셔서 예수님을 모시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눅 19:1-9). 비상시에는 체면을 차릴 여유가 없습니다. 옷을 찢었다 함은 자기를 부인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생명을 건 것입니다. 또한 옷을 찢었다고 함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성령에 큰 은혜와 권능이 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과거에 자기가 하나님께 대하여, 죄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품고 있는 생각을 고치는 것을 말하고, 히브리어 “나캄”은 슬퍼함을 의미하고, “슘”은 돌아옴을 의미하는데 이는 회개의 양면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지, 정, 의에 근거한 회개가 있어야겠습니다. (1) 지적으로 1) 죄인이 자기의 죄를 참으로 앎이오.(시 51:3-4). 2)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롬 2:4). (2) 정적으로 1) 자기의 죄를 원통히 여기며 2) 자기의 죄를 미워하고 (3) 의지적으로 1) 죄에서 떠나고 2) 하나님께 돌아와서 3) 새로 순종하기로 결심함이 있어야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요엘 선지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비상시국에 갑절의 은혜와 갑절의 축복, 갑절의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데, 먼저 죄 된 옷을 찢어버릴 때 받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죄의 옷, 세상 옷을 갈기 갈기 찢어 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의 옷으로 갈아 입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엘리사는 목적이 분명한 기도의 사람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상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 850인과 대결하여 기도할 때에는 자기 생명을 건 것이고, 다니엘이 사자굴에 투입될 것을 알면서도 계속 기도한 것은 생명을 걸고 기도한 것입니다. 마 10:39에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귀한 목적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구하면 반드시 얻게 될 줄로 믿어야 합니다. 엘리야도 승리하였고, 다니엘도 승리하였고, 엘리사도 승리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졌습니다. 과연 엘리사는 영감을 갑절을 받고 엘리야의 상속을 받은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강한 영감을 충만이 받은 엘리사는 어려운 시국에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엘리사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신앙으로 승리하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갑절의 영감을 구하여 받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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