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회개하라 (마 11:20-24)

첨부 1


사람은 누구든지 재앙을 싫어하고 축복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축복을 받고 어떤 사람이 화를 받습니까 물론 악하고 불의한 사람이 저주를 받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롬 3:10에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하였으니 이 말씀을 기초로 한다면 복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저주받은 인간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죄가 문제가 아니라 회개가 문제입니다. 회개만하면 우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되며 또한 먹보다도 검은 죄를 양의 털과 같이 희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0절 말씀에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않으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권능을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적, 표적, 권능을 행하셨는지 기록이 없음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가버나움에서 행한 이적 기사가 그의 하신 일 중에서 가장 큰 것들 중의 어떤 것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에 대해서 얼마나 적게 알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마지막에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 속에 있는 강조점을 포착하여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화있을진저 고라신차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라고 되어있습니다.

1. 화있을진저 이 말씀은 벳새다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벳새다는 주님께서 권능을 많이 베푸신 도성입니다. 이것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므로 화있을진저 고라신아 벳새다야 하진 것입니다. 화있을진저라는 원어는 “오우아이”(Ouai)인데 슬프다라는 뜻입니다. 분노의 말이 아니라 슬프다는 말입니다. 이 이적을 두로와 시돈성에서 행하였더라면 저들이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요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가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였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죄가 두로와 시돈보다 더 심한 것을 보니 그 죄는 대단히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는 과거나 현재나 죄의 도성을 나타내는 대명사로 되어 있습니다. 고라신-오늘날의 지도상에는 텔훔(Telhum)이라는 지명입니다. 가버나움 북쪽 10리쯤 떨어진 곳으로 신약에서는 본문에서만 나타납니다. 벳새다-오늘날의 지명은 에트텔(ettel)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연안에 위치하고 있고 베드로와 요한, 빌립의 고향이며 예수님께서 이 광야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장정 5,000명을 먹이신 곳입니다. 두로와시돈-베니게의 항구로써 예수님 오시기 전 1,500년 전에 세워진 고대 도시입니다. 이곳은 대표적 이교의 도시로 늘 책망듣던 도시입니다. 오랜 번영의 도시들이었던 두로와 시돈은 최후의 심판 날에 정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라신과 벳새다가 받을 심판보다 가벼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야의 직접 전도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회개할 가능성이 켰기 때문인 것입니다.

2.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죄 (1) 특권에 대한 책임을 망각한 사람들의 죄였습니다. 갈릴리에 있는 도시들은 두로와 시돈 혹은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주어지지 아니한 특권과 기회와 행운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갈릴리의 도시들은 실제로 예수 자신을 볼 수 있고 그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지한 자나 무지로 인해 죄짓는 자를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것을 아는 자가 죄를 지으면 정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사람은 그가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만큼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그 특권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받을 정죄도 그 만큼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그 죄는 무관심의 죄였습니다. 이 도시들은 예수를 공박도 하지 않았고 그를 성문 밖으로 몰지도 않았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무관심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무관심한 것은 박해하는 일 못지 않게 살인적일 수가 있습니다. 무관심은 종교를 불살라 죽이지는 않지만 종교를 꽁꽁 얼려 죽이는 것입니다. 무관심은 종교의 목을 단숨에 베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졸라서 질식해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3. 음부에 떨어지리라 이 말씀은 가버나움 성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십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친히 사신 동리인 동시에 권능과 표적과 기사를 많이 행하신 곳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축복과 하나님의 은혜는 권능으로 행하는 표적과 기사를 보는데 있는 것이 아니요 믿고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성도는 죄를 회개함으로 축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듯 싶으냐 음부에 떨어지리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는 이미 멸망을 당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보다 더 중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 론 화있을진저 하신 것은 고라신과 벳새다의 불회개를 경고한 말씀이요 음부에 떨어지리라 하신 말씀은 가버나움을 경책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회개함으로 주님의 경책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교회도 의로워져야 하겠습니다. 내 민족과 동족의 심령도 의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저를 의롭다 하였으니 우리도 회개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을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