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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무기없는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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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1869-1948)는 영국에 유학하여 변호사가 되자 아프리카에 있는 영국 식민지인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떠났다. 이 나라에서는 백임과 유색인종 사이에 큰 차별을 하고 있었다. 간디가 남아프리카에 도착하여 1등칸을 타고 여행하고 있는데, 차장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당신은 인도인 아냐? 이곳에서 나가줘. 여긴 백인 전용이니까.'
'나는 이처럼 1등 차료를 사서 타고 있는데요.'
'차표 같은 건 소용없어. 여긴 당신이 있을 곳이 아냐. 냉큼 나가지 못해?'
차장은 경관을 불러 항의하는 간디를 내쫓았다. 이런 억울한 차별대우를 변호사로서의 간디의 정의감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인간이면서 단지 피부 색깔의 차이로 이처럼 차별한다는 것은 말도 안돼.' 이라하여 간디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세상의 관례와는 판이 하였다. 그것은 `비폭력, 비협력, 비복종'을 무기로 하는 투쟁이었다. 간디의 호소에 많은 인도인, 흑인들이 동조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자 자기 위치에서 실천해 나갔다.
남아프리카 정부는 이 비폭력 투쟁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투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운동에 새로 가담하는 사람의 수가 그치지 않았다. 이윽고 남아프리카는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형무소도 초만원을 이루어 더는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형무소 재소자의 식비가 늘었다. 드디어 정부는 악법을 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간디는 23년 동안 이곳에서 운동하여 얻은 성과를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도의 독립을 위해 활용하기 위해 1915년 고국 인도로 돌아왔다.
그는 수없이 체포, 투옥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반영 비폭력, 대중 운동을 계속해서 앞장서서 전개했다. 드디어 1947년, 이 무기 없는 투쟁 앞에 대영제국은 패하고 말았다. 인도는 숙원인 독립을 쟁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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