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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계보 (창 04: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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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역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다만 역사는 섭리 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자유속에서 사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장중에서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시 31:15에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했고, 사 49:16에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라는 말씀을 보면 인간 모든 세대가 다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악인이 보응받은 것이나, 악한 세대가 멸망받는 것이 결코 인간 조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악인이 흥하여질 때가 있고, 의인이 망하는 것 같이 보여지기도 하나 그것은 인간의 무지와, 인간의 눈이 멀리 바라보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인간 수단 방법에 있는 것이라면 속여 먹고 빼앗아 먹는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수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 16:1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했고, 잠 16:9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고, 세계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사람은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눈이 보이는 대로 쫓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언제나 그 자신이 행한 그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를 악한 길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류 역사를 살펴 볼 때마다, 또 성경을 상고해 보면, 거기에는 두 계보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가인의 계보와 아벨의 계보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살았지마는,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라에게서 난 이삭의 계보가 있고,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의 계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계보인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 계보인 아랄 족속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옛부터 오늘 날까지의 이두 계보의 민족간에는 싸움이 끝일 날이 없었습니다. 이삭의 두 아들의 경우에도 야곱 계보와 에서 계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었고, 에서는 미워하시었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은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았으나, 에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야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모세 시대에도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신앙으로 지도자 모세를 따라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고라와 드다와 같이 불신앙적인 데서 당을 지어 하나님의 종 모세를 반역하고 하나님을 거스려 행한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선지자들 중에서도 발람 계보가 있고, 사무엘 계보가 있습니다. 삯을 위하여 예언한 발람은 자기 자신을 팔고, 신앙을 팔고, 민족을 팔아 멸망으로 몰아 넣었습니다만, 사무엘과 같은 선지자는 자기를 희생시켜 민족을 위하여 그 사명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열 두 제자 중에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이 충성을 다 한 제자가 있었고, 가룟 유다와 같이 돈 몇 푼에 자기 스승을 판 배반자도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이조말에 이완용과 같이 나라를 판 자가 있으며, 민영환 씨처럼 충절을 가지고 순국한 이가 있으며,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선혈들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하나는 망국의 결과요, 다른 하나는 잃어버린 국권을 찾아 광복에 이르게 한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이순신 장군이나, 김덕영같은 충신이 있었으나 나라를 망하게 하는 간신배와 당쟁을 일삼아 나라를 망치게 한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 왜군을 무찔러 공을 세운 사람이지만, 김덕영 장군은 육군으로서 외적을 막아 큰 공을 세운 장군입니다. 그러나 당파싸움으로 말미암아 그의 공이 세워지는 깃을 시기 한 반대당의 무고로서 김장군이 이몽학의 역도에 가담하였다 하여 한참 전승을 올리고 있는 김장군을 서울로 잡아올려 지금 단성사 있는 곳에서 때려 죽였습니다. 이 때 형리라 아무리 때려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김장군은 말하기를 “너희들이 죄 없는 나를 때려 죽이려 하니 내가 억울해서 죽을 수 없다 정 나를 죽이려면 죽이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만고 충신 김덕영이라고 글을 써 붙이고 명분을 세워 놓고 나를 때려라 그러면 내가 편하게 쉽게 빨리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하는 수 없이 형리들이 “만고충신 김덕영”이라는 글을 써 붙여 놓고 때렸는데, 단 한 번의 매로 죽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선조대왕 때 일인데 그 때 각료 중에 윤두수라는 분은 김장군을 살리려고 애를 썼지만 당파싸움으로 인하여 정적이었던 류성룡이 반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합니다. 남인이 주도권을 쥐고 정치하던 때라 서인이었던 윤두수의 말이 설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 후 의인을 구하려던 윤두수 후손의 계보는 그 가문이 영달하였으나, 반면 류성룡의 후손은 그 가문이 쇠잔하여 이렇다 할 인물이 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가인의 계보에서는 이렇다 할 의로운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벨 계보인 셋 계보에서는 성경의 모든 인물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9대손에 노아가 나왔습니다. 참으로 노아는 의롭게 사신 분이요, 아담과 함께 인류의 시조가 된 것입니다. 또 노아의 10대 손에서 아브라함이 출생되었고, 아브라함부터 14대 손에서 다윗 왕이 태어났고, 다윗의 27대 손에서 인간의 혈통이 아니지만 우리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계보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십니다.

 1 . 가인의 후예

한 노래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에 작은 연못 하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고 있지 않지만, 먼 옛날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싸움이 벌어져 두 붕어는 물고 뜯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마리는 죽어 물 위로 떠오르고, 그 고기는 썩어들어 갔습니다. 그러자 연못도 썩어들어 갔습니다. 이긴 붕어는 영원히 살 줄 알았는데 썩은 물을 먹게 되자 얼마 후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 연못은 아주 썩어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도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일본 큐슈 서남쪽에 자리 잡은 적은 항구도시 미나마탄이 있었습니다. 미나마탄 강변에는 수없이 많은 고기떼가 죽어 가고 그 동네 고양이는 모두 춤추는 병에 걸려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비극은 더 깊고 심각했습니다. 수천 명의 인간 생명들이 낳자마자 죽어갔고 태어나 산 사람은 과거에 상상할 수 없는 괴상한 병신들이 되어 목숨만이 연장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은 동자 없이 하늘을 쳐다보며, 팔은 안으로 비틀어 구부러졌으며, 다리는 발육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비극에는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chisso 공장에서 나오는 오물들을 마구 강에 내뿜었는데 그 동안 이것을 먹고 마신 고기들이 minamata 병이란 병균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 고기들을 잡아먹은 어부들은 그 무서운 병균을 보유하게 되었고, 그 고기를 사고 먹은 모든 시민들이 이 병에 걸린 것입니다. 현재 그 동네에는 900여 명의 처참한 인간 병신들이 두뇌도, 신체의 기능도 마비된 채 목숨만을 연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공장은 이익 때문에 공해문제에 촌보도 양보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가인의 후예로 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유태인이라는 죄 아닌 죄 때문에 600만 명의 생명을 가스실에서 독살한 나치스 히틀러의 비극은 시대마다 모양을 달리하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피흘림의 역사는 언제 어디서 시작했습니까? 성경은 가인 때 부터라고 대답합니다. 가인의 후예는 오늘도 공산주의로 나타나 피에 굶주린 사자같이 마구 찌르고 쏘고 살해하고 전쟁의 피를 흘리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향상 깨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면서 가인의 후예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 뿐 아니라 사회도 국가도 도두 가인의 자리에서 떠나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아벨의 후예

 아벨은 죽었으나 그 피의 호소를 하나님이 돌보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벌을 받았으나 아담은 아벨 대신 셋을 얻었습니다. 셋의 후예에서 메시아가 탄생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아벨의 수난을 숙명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개인의 십자가, 가정, 교회, 민족의 십자가를 눈물로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벨의 후예입니다. 예수의 피는 땅에서 남의 피를 삼키려던 인간의 죄악성을 해결하시고 그곳에서 생명, 사랑의 약속을 맡아 놓는 피였습니다. 가인의 피흘림이 우리 역사를 착취와 욕심과 죽음으로 물들였다면 예수님의 몸과 피는 저주받은 이 넷의 역사를 사랑과 정의와 용서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로운 계보가 생겨졌습니다. 새 계보를 십자가를 통해서 주신 사건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 새 계보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이루어 주시었고, 성령의 역사로써 성취시켜 주시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음으로 새 계보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계보에 속해있습니까? 가인의 계보입니까? 아벨의 계보입니까? 가인의 계보에 속한 자는 심판 날에 저주를 받을 것이요, 아벨의 후예는 주님과 함께 영화롭게 천국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아벨의 후예로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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