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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7단계 (창 2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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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더스 니그렌은 하나님의 아가케와 인간의 에로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4단계로 말하였습니다. ① 먼저 자기를 사랑하고 ②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③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④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 외삼촌 집에 와서 라헬을 만나 그를 아내로 맞기까지 14년의 세월 동안 라헬을 위해 라반에게 봉사하고 그려늘 아내로 얻은 사건에 대한 기사입니다. 우리는 본물에서 야곱을 주님으로, 라헬을 주님의 사랑하는 신부교회로 해서 주님이 주의 신부되는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는 가를 7단계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1. 찾아주는 단계

 주님은 먼저 인간들을 구원하셔서 신부로 삼기 위하여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의 우리를 찾아오신 모습은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1) 생수의 주님으로 사랑에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 가시면서 생수로써 만족한 은혜를 주시던 주님께서 라헬을 찾아주실 때도 생수의 주님으로 맞아주시었습니다. 구원 성취에 있어서 우물가의 사건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삭의 혼담애기가 우물가에 시작되었고( 창 24:11), 사마리아 여인 (요 4:6), 이삭의 축복 사건에서 ( 창 26:19-23), 아브라함의 브엘세바 우물 ( 창 21:31), 다윗이 전쟁터에서 사모하던 베들레헴 우물물( 삼하 23:15), 본문에서 야곱이 장차 아내될 라헬을 만나는 우물( 창 29:2) 등 족장들과 여러 신앙인들의 역사가 우물가의 사건과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두 목마를 자들입니다. 돈, 사랑, 지식, 권력에 모두 목마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구원의 우물가로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2) 대속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3) 친구이신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4) 평강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5) 목자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야곱은 들에서 라반의 양떼들에게 우물 아구에 있는 돌을 옮기고 물을 먹이었습니다(10절).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 10:11). 그래서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시 23장). (6) 대언자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7) 사랑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의 길에 들어서시길 바랍니다.

2. 고백의 단계

 사랑은 위대한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에 진실한 고백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랑은 위선적인 것이 되기 쉽습니다. 야곱이 라헬과 입 맞추고 소리내어 울고 자기의 신분을 라헬에게 고하였습니다. 라반은 라헬의 고백을 듣고 달려와서 야곱을 영접하여 안고 입 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였습니다. 우리는 라헬이 야곱과 입 맞추고 달려가서 그의 아비에게 사실을 다 고한 것과 같이 우리도 진실하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고백의 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의 단계가 있는 자만이 주님과 더불어 사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는 사명은 주님을 사랑하는 고백에서만 얻어지는 귀한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생활 속에서 항상 넘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 연애의 단계

 사랑은 서로의 만남이요 만남에서 고백의 단계를 지나서 서로 연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과 연애하므로 야곱은 더 정열적이고 적극적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모든 일을 성공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국 땅에 와서 그이 첫 연애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서 많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눈에는 라헬 밖에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오직 라헬만을 사랑하고 위해 살아온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만을 위해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봉사의 단계

 (1) 봉사의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야곱은 외삼촌과 보수가 결정된 후 라헬을 위해서 “ 봉사 ” 한다는 말이 기록되었습니다. 야곱이 이른 아침부터 황혼 때까지 양에게 물을 주고 풀을 뜯기고 양을 돌보는 고된 생황이 하루 이틀이 아닌 7년을 봉사할 수 있었음은 그 곁에 라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봉사의 종교입니다. 불행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사외와 국가와 봉사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을 교회의 사명인데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2) 봉사는 즐거움이 수반됩니다. “ 사람이 연애하면 하루에 나이를 먹는다 ” 라는 말이 있습니다. “ 연애는 결혼의 새벽, 결혼은 연애의 황혼 ” 이라는 프랑스의 격언과 같이 야곱은 연애하는 마음으로 7년을 수일 같이 여기고 라반을 위해 봉사한 것입니다. 사랑은 위해 하는 봉사이기에 힘든 모든 것을 능히 참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모든 것이 즐거웠던 것입니다. (3) 봉사는 더 좋은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야곱은 레아를 위해 7일 동안의 잔치기간을 마친 후 라반이 라헬도 아내로 주겠다는 허락을 받고 다시 7년을 봉사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비록 라반에게 속았지만 사랑하는 라헬을 위하여 7년을 더 봉사하고서라도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자 그는 기꺼이 더 봉사를 했던 것입니다.

5. 고통의 단계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랑의 십자가를 져야하는 고통이 수반되어야 하듯이 위대한 사랑에는 고통이 수반된다고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위대한 사랑은 고통 속에서만 정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장미는 가시로 인하여 더욱 아름답고 향기를 날리듯이 예수님은 십자가의 가시관으로 인하여 영광이 면류관이 주어진 것입니다. 야곱과 라헬의 그 열렬한 정열적인 사랑 속에 행복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숨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 고통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사랑은 위대했는지도 모릅니다. 레아에게도 숨은 괴로움과 고통이 있었으며, 라헬에게도, 야곱에게서도 삼각관계에 얽혀진 사랑 때문에 오는 숨은 고통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상에 달리신 주님의 고통이긷 합니다. 레아의 고통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고통이요, 라헬의 고통은 출산하지 못하는 고통이요, 야곱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는 고통들이었습니다. 6. 질투의 단계

 사랑이 고통의 단계를 지나면 투기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아 8:6에 “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 고 했습니다. 레아는 아들을 네이나 낳았으나, 라헬은 한 아들도 낳지 못함으로 인해 레아를 시기하고 질투한 것입니다. 레아는 라헬을 질투한 나머지 자기의 몸종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 아들을 얻는 실수를 범했고, 레아는 이에 맞서 자기 몸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또 아들을 낳게 한 것입니다. 나중에 라헬은 맥추 때 루우벤이 들에서 얻어온 합환채 “ 임신 촉진제 풀 ” 를 어머니 레아에게 주는 것까지 투기하여 그 합환채를 자기가 받고 야곱을 레아에게 양보하기까지 투기하였습니다. 합환채 사간이 있는 후 하나님은 라헬을 생각하사 태를 여신 것입니다. 라헬은 죽기까지 하려는 극한 마음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든 일을 진리의 법도대로 행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투기심에서 성장한다는 말이 진리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너무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을 용납하시지 아니하십니다. 라헬과 같은 우리 성도는 돈도, 명예도, 지식도, 그 무엇도 주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최대, 최고, 최후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7. 영원의 단계

 창 35:20 에 “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으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 ” 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밧담아람에서의 가지 가지 추억과 잊을 수 없는 많은 사연들을 남기고 20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리운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도중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비극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출산하고 거기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많은 죽음이 있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아들을 낳고 출혈이 너무 심해서 그로 인하여 사별하게 되었다는 일처럼 슬픈 일이 어디 있겟습니까? 수많은 공동묘지 앞에 서면 그들이 이 땅에 살아있을 때 많은 사연들을 가졌던 것과 죽을 때의 슬픈 사연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라헬은 야곱에게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라헬을 잃은 것은 야곱에게 전 생애를 잃은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람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반드시 정리해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헤어짐에 대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비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참 뜻을 발견하고 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해서 베들레헴 갈기의 그이 묘비를 세운 것과 같이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영원한 진리의 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이 땅에 전해 주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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