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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경고와 이스라엘의 회개 (출 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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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이 처한 위치를 지적하였습니다. 수주일 전에 그들이 맹세한 언약을 어김으로(출 19:5-8) 그들은 그의 백성으로서의 하나님과의 유대관계를 몰수당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르기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할지라도 모세가 그의 간구로 호소한 바 대로(출 32:13) 족장들에게 하신 그의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약속에 따라 그들에게 그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출 33:2에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브스 사람을 좇아내고 너희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다음에 이르시기를 3절에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도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백성은 은혜의 대상이지만 목이 곧은 백성들은 낮아져야만 했습니다. 압제받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남으로 응답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의 가증한 우상의 노래는 엄중한 징계의 소리로 응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앞에 사자를 보내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광야 같은 인생길에 하나님 없이, 구세주 없이 혼자서 걸어간다고 하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구세주를 모시고 그를 의지하여 그들을 따라가는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4절에 “백성들은 황송한 말을 듣고 슬퍼하여”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백성이 보인 첫번째 희망적인 전조였습니다. 이 구절의 슬피운다는 말은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단장품을 제하여 버리고 근신하였습니다. 여기에 황송한 말씀이라는 말은 “슬픈 말씀” 또는 “불행한 말씀”이라는 뜻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이 슬픈 말씀을 듣고 대단히 슬퍼서 모든 단장품을 제하여 버리고 몸치장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몸단장하지 아니한 것은 회개의 뜻을 나타내는 표현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슬프거나 회개하는 뜻으로 옷을 찢었습니다(욥 2:12). 이제 우리의 삶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과 동행할 것을 다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데로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빕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겠다고 했는데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우리 길을 걸어 왔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으로 자처하는 우리는 성숙한 삶의 태도를 자랑합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우리 자신의 힘과 지혜대로 살고자 하며 이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는 어리석은 자의 소행이요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 생각하는 우리들은 우리의 약함도 알고, 우리의 부족도 알고, 우리의 어리석음을 알고, 우리의 고집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다 앞설 때 언제나 실패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신앙생활 할 때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금년도의 우리 신앙생활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는 길에 동행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 우리의 길이 불안해도 겁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면 우리가 어떤 험한 길을 간데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면 어떤 고난의 길과 수치의 길이라도 겁내지 않고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면 어떤 미지의 세계라도 담대히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일 우리와 동행을 거부하신다면 매우 큰 충격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을 단념하신다는 것은 그의 은총과 사랑과 도움과 인도하심을 단념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동행할 것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동행하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분이 하나님이요, 그들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동행하지 않겠다고 하니 그들에게 이것보다 더 커다란 절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시지 않겠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에 대해서 출 3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대신 그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섬긴 것입니다. 즉 그들의 죄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건지시고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오게 했고 만나와 반석의 생수, 메추라기로 먹였고 십계명까지 주었건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랐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을 단념하셨는데 당연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역사적 교훈을 돌이켜 볼 때 우리들의 신앙을 위해서 좋은 교훈이었다고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자기의 욕심에 따라 자기 신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금송아지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들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 대신, 우리를 평안하게 해 주는 물질이란 것을 우리 안방에 금송아지처럼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100년이란 기간 동안 이룩했다는 근대화를 10년이란 기간 동안에 단축시켜 과학과 물질만능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 육신의 안일함과 쾌락을 따라 물질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정치인대로 권력의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의리도 양심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권모술수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생각하면 금송아지를 섬기는 자는 옛날 이스라엘사람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금송아지를 모세처럼 깨뜨려 버려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 안에서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도 영원한 생명과 함께 다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 영원한 소망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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