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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하고 담대하라 (수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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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는 120세의 고령에 도달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운명의 예정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수명의 기간이 다 찼다는 말입니다. 인생이란 언제나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나고 생존하다가 예정 속에서 부름을 받아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다 이 진리를 깨닫고 믿을 때 비로소 강하고 담대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제 2대 지도자를 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임명받은 사람이 여호수아 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나고 움직여 사는 인생임을 깊이 깨닫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임명할 때 임명식장에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고 오늘의 우리들의 것으로 삼아야 이 세상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것이요, 동시에 전도자요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에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동력은 강하고 담대한 신앙이요 이스라엘이 가나안 복지를 획득한 힘도 강하고 담대한 신앙이었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어떤 때에 강하고 담대한 신앙이 필요했습니까? 1. 요단강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려는데 요단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 때는 모맥을 거두는 때라 요단강수는 창일하고 급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다리를 놓고 도강할까? 배를 타고 도강할까? 하는 것은 사람의 방법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요단강을 향해 법궤를 멘 제사장이 먼저 발로 디디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제사장은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힘찬 일보 일보 신앙의 발이 요단강에 내딛자 용세가 강했던 요단강수도 멈추었습니다. 법궤 아래에서는 요단강수가 끊어졌습니다. 상류는 끓어지고 하류는 내려가 버리니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요단을 건넜습니다. 요단강은 때로는 인간 세상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에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막다른 징검다리 입니다. 요단강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입니다. 이 경계를 이길 수 있는 것이 담대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 앞에 요단강은 준비를 잘 갖춘 사람만이 강하고 담대하게 잘 건너갈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를 갖추지 못한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 갈팡질팡하게 되어 불미하고 불행한 최후를 남기게 됩니다. 요단강을 무난히 건널 수 있는 방법은 (1)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야 합니다. (2) 백성들은 언약궤 뒤에서 따라 갔습니다. 우리는 흔히 혈기를 내세우고 내 지식이나 내 지혜나 경험을 내세우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은 좌우로 치우치는 것이니 요단강을 무사히 건너갈 수 없는 것입니다. 2. 여리고 성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은 도강을 기념키 위해 열 두 돌을 취하여 길갈에 기념탑을 세운 뒤에 할례를 모두 행하고 가나안 최초의 유월절을 지켰으나 이제 가나안 복지를 취하려면 전진하여 여리고 성으로부터 전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리고 성은 국경의 제 1선에 있는 성이요, 국방 제 1선인 바, 수비가 견고하고 경계가 근엄합니다. 이에는 어떤 무기로도 공격하기 어려운 요새지였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운명은 이 제 1선의 승부에 달렸는데 적은 강하였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의 전략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다만 강하고 담대한 신앙이 있을 뿐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의 전법이 있을 뿐이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할 뿐입니다. 여리고 함락, 이스라엘의 승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행함에 있었습니다. 신앙의 전투에도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마음 속에 여리고 성, 죄악의 여리고 성, 마귀의 여리고 성, 세상의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성도는 죄악의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데는 포탄도 아니요 지뢰도 아닙니다. 죄악의 성을 정복함에는 권력도 아니요 학문도 아니라 신앙입니다. 의식으로도 못하고 도덕으로도 못하고 복음의 나팔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 함락에는 강하고 담대한 신앙이 있을 뿐입니다. 3. 가나안 점령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각 지파에게 분할할 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강하고 담대하라” (수 10:25)고 했습니다. 가나안 정벌의 완성이 여호수아 때 완성된 것이 아니며 전투는 후대에도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수 24장의 설교는 여호수아가 후배들에게 하는 설교입니다.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영원히 계실 곳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영원히 섬기기 위하여 우상을 섬기지 말고 가나안 사람과 혼인하지 말고 악한 죄에 물들지 말고 성별된 생활을 하며 강하고 담대한 신앙으로 전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사기에 보면 여호수아 별세 후 이스라엘은 장구한 전투의 고생 끝에 가나안을 점령하였으나 정신적으로는 정복을 당하여 가나안인들과 조화를 이루고 말았습니다. 광야에서 생존한 사람은 한 사람 두 사람 다 떠나 가고 이제 새 사람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법궤는 비석과 함께 제도의 관 속에 봉해 버렸고 아무 생명의 약동이 없는 의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요단강을 끓고 여리고 성을 함락하던 일은 현재는 있을 수 없는 고담으로 남고 신화에 불과하는 교리 뿐으로 남았습니다. 광야 시대 건전한 의지는 어느덧 사해에 묻혀 버리고 가나안 술에 취하여 길갈의 열 두 기념탑 앞에서 음란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의 우상 바알을 섬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지 않겠습니까? 음란의 가나안이 선민의 복지가 되기까지 죄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 예수님의 나라가 되기까지 기독교 군병은 선한 신앙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누가 강하고 담대한 자입니까? 돈 있는 자도 아니요, 지식있는 자도 아니요, 신앙의 사람이 강하고 담대한 사람입니다. 누가 강하고 담대한 사람입니까? 권력을 가진 자도 아니요, 만군을 통수하는 장군도 아니요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자가 강하고 담대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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