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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용사가 엎드러 졌도다 (삼하 0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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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건국지요 초대 왕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길보아 산상에서 전사한 비보를 들은 것은 다윗이 아말렉을 쳐서 파하고 시글락에 돌아 온지 삼일만의 일이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에게 패하고 다윗은 아말렉 사람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조는 사울 왕 부자의 서거를 슬퍼하는 다윗의 활 노래(弓歌)로 먼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1. 이스라엘의 영광이 엎드려졌도다(15-16절) 19절에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영광이라는 말은 히브리 뜻으로 “자랑거리”를 가리키는데 사울과 요나단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자랑거리이나 사울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다윗은 여기서 죽은 사울의 모든 과오를 용서하고 그의 장점만을 말하는 신앙 시인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즉위 초기에는 선왕이었으니 다윗은 사울의 장점만 본 것입니다. 20절에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명가는 하나님 여호와에게 결부되었으니 그 명가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다윗의 사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적국 블레셋의 딸들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인하여 즐거워하게 되면 그것은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것이 되며,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이것을 원통히 여긴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은 본래 아리안 족속인데 섬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륙을 돌며 유고슬라비아(당시 달마시아)를 거쳐 아시아 동남방을 지나 팔레스틴 지방의 제일 비옥한 곳에 자리 잡고 모세시대 출애굽 이후 1,000년 동안 국경을 맞대고 호시탐탐 침략을 노리던 강국이었습니다. 블레셋 민족의 특색은 단결성과 잔인성입니다. 산업으로써 철기구를 세계 최초로 발달시켰고, 무기를 제조하였고, 아름다운 색채 도자기 기술이 비상하다고 합니다. 본문에 “이 일을 가드와 아스글론에 고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블레셋 나라에는 군사도시, 상업도시, 공업도시, 항만, 무역도시, 해양 요새 도시의 5대 도시가 있는데 가드는 정치 중심지였고, 아스글론은 여신 아스다롯 신전이 있는 종교 중심지인데 삿 18:2에 보면 정치적으로 40년간 침략하였고, 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고 하나님의 성전을 불태워 종교를 유린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라고 했습니다. 블레셋 여성들은 애국심이 강하고 잔인하다고 합니다. 사사기에 나타난 기생 들릴라는 자기 나라 첩자들과 짜고 이스라엘의 거장 삼손의 눈을 뽑아 지하실에서 멧돌을 돌리다가 죽게 만든 사람임을 보아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강국을 물리치고 왕국의 기틀을 바로잡은 이스라엘의 영광의 용사가 엎드러진 것입니다. 2. 이스라엘 유공한 용사가 엎드러졌도다(24-25절) 24절에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저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라고 했습니다. 사울의 생전에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군인들이 전리품을 가져다가 이스라엘의 여인에게 준 일이 있습니다. 25절에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려졌도다 요나단이 너의 산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영광과 힘 있는 용사 요나단이 엎드려졌으니 다윗은 요나단의 생전에 자기에게 베풀어 준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슬퍼한 것입니다. 사울 왕이 발작적인 시기심과 의심으로 두 차례나 창을 던져 다윗을 벽에 박으려 했고, 자기를 죽이려고 12년간 유다 왕야를 추격하였을 때도, 마침내 악귀에 잡혀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할 때에도, 동굴 속에 잠자는 장면을 발견하였을 때에도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서 존경을 다하여 시종 변하지 않고 충성하던 그가 오늘 사울 왕의 서거의 소식을 듣자 저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다음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야비한 기쁨이 생긴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이웃나라의 침략의 기회를 줄까, 국민의 사기가 저하될까, 원수들이 비웃을까, 국가가 흔들릴까 하는 진정한 애국심에 분발되어 사사로운 원한을 넘어서 애국심으로 화하여 활 노래 조가를 부르면서 비탄하는, 하나님을 공경하며 나라를 사랑하는 위대한 인격자 다윗의 관용과 도량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심정을 신앙이 없는 정치가들이 어찌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붉은 옷으로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는 말은 사울 왕이 여러 차례 주위에 군소국가들을 쳐서 물리치고 전리품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의식주가 부유할 뿐 아니라 그 덕택에 이스라엘 딸들이 붉은 화려한 옷과 금 장식품을 가지게 되었다는 국내외의 치적의 혁혁한 유공의 용사가 넘어진 것을 슬퍼했습니다. 3. 이스라엘의 간성(干城)인 용사가 엎드러졌도다(26-27절) 26절에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강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기이하다 라는 뜻은 히브리어의 뜻으로 기적적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은 사실상 자연적 인연을 초월한 사랑이었으니 기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부친은 늘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다윗을 사랑하였습니다.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부부는 서로를 위하여 지음이 되었으므로 서로 주고 서로 받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위한 요나단의 사랑은 그것과 달라서 의롭고 영구하고 이기주의가 없고 자기를 거부한 것으로 역사상에서 찾아보기 드문 것입니다. 27절에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려졌으며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오호라”란 말은 슬픔의 감탄사입니다. 사울의 죽음은 실상 다윗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남은 문제를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 주는 의인이었습니다. 다윗의 이와 같은 태도는 정치적 쇼(Show)가 아니고 여호와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남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신앙이었습니다. 다윗의 생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요나단이 이를 구한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저는 부왕의 면전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공적으로 다윗을 변호했으며,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하여 십 황무지 수풀에 숨어 있을 때 요나단이 찾아와서 삼상 23:16-17에 “여호와를 힘 있게 의지하라 내 부친의 손이 너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조가는 사울에게서 요나단으로 옮겨졌습니다. 다윗은 자기와 요나단의 사랑을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맺어진 우정이란 뜻인데, 믿음에서 나온 우정은 하나님께로 나온 사랑으로서 육적으로 인하여 더렵혀지지 아니하고 질투도 없는 열열하고 깊으면서 사심이 없는 사랑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나라의 영광, 나라의 행복, 국가의 간성이요, 애국의 지주였다고 그의 위대한 인격과 강한 무용을 찬양하고 국민의 노래책인 “야살의 책”에 기록하여 그들의 공로를 깊이 찬양케 했습니다. 이제 사울은 갔으니 다윗 같은 지도자가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은 참으로 위대하시고 과연 인간 역사의 운전대는 하나님의 손에 계신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성도는 “이런 거시적인 다윗 같은 지도자를 주십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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