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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레스 웃사 (삼하 0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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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인하여 블레셋에 빼앗겼던 법궤는 사울 왕 재임 기간 동안 이방에 방치되어 있다가 다윗이 즉위하면서 다윗 성으로 옮겨오는 계획이 실천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궤를 운반하는 도중에 웃사의 잘못으로 하나님께서 웃사와 충돌하시고 진노하사 웃사를 치시니 웃사가 하나님의 언약궤 곁에서 죽었습니다. 베레스 웃사란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다윗 왕은 여호와의 궤를 자기 성으로 옮겨오기를 두려워하며 주저하고 있을 때 가드 사람 오벧에돔이 그 언약궤를 자기 집으로 옮겨감으로 크게 축복받았습니다. 여호와의 궤는 그룹(천사)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 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으로써 오늘날 교회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오늘 교회에서 봉사하는 우리들은 (웃사)처럼 징벌 받지 않고(오벧에돔) 같이 축복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치셨던 베레스 웃사의 실패 원인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 베레스 웃사의 실패 원인 (1) 경솔한 봉사 태도입니다. 법궤는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아무나 손댈 수 없습니다. 거룩한 레위 지파 중에서도 고핫 자손만이 위임받은 직무였습니다. 그런데 웃사는 법궤를 메고 가야 할 거룩한 직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레에 싣고 갔는데, 이것은 경솔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마차와 같이 인격이 없는 수레 위에다 세속 된 물건처럼 당신의 법궤를 싣고 가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인간의 어깨 위에 소중하게 메고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무서운 질병 중의 하나는 웃사와 같이 법궤를 어깨에 메지 않고 수레에 실어서 손을 놓고 뒤따라가려고 하는 경솔한 봉사 태 도 입니다. (2) 거룩한 진리를 속되게 하는 태도입니다. 롬 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세속화 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화되어야 합니다. 세속화란 기독교가 시대의 조류와 정신에 양보하는 것을 말하며, 기독화란 세상을 기독교의 정신으로 정복하고 이끌고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윤리는 변하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점점 세속화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속주의는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웃사가 하나님의 법궤 밑에서 죽은 까닭은 여호와의 법과 충돌하여 이방블레셋 사람들의 방법을 거룩한 사명 완수에 도입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거룩한 진리를 속되게 다루는 태도를 웃사가 취하였기 때문에 법궤를 끌고 가면서 법궤 밑에서도 축복을 받지 못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방인의 생각과 이방인의 3법대로 살아갑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대로 둡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버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징계 가운데 제일 무서운 징계는 잘못하였으나 책망이 없고, 징계가 없으며 형벌이 없는 것입니다. 히 12:8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하였으니 웃사가 징계를 받은 것은 그가 사생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고 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인간 손으로 구조하려는 결과는 마침내 하나님과의 충돌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2. 베레스 웃사의 죽음이 주는 교훈 (1) 선한 목적은 선한 방법으로 달성해야 합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언약궤가 겨우 길르앗 여아림에 돌아와 거기에 유치된 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왕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전혀 이에 대하여 관심이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이 된 후 그의 왕국의 기초가 확립되자 먼저 변방에 유치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 싶었습니다. 새 수레를 만든 것이나, 정병 3만명을 동원한 것을 보아 언약궤를 맞기 위한 그의 열과 성이 얼마나 지대했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목적은 좋았지만, 방법이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레위 지파 중 고핫 자손만이 그것도 어깨에 메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수레에 싣거나 3만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따위는 이방인의 방법인 것입니다. 선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지만 방법이 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2) 열심은 지식을 동반해야 합니다. 언약궤가 바알레유다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유치되어 있는 동안, 이 궤를 모신 사람은 아비나답의 아들인 웃사와 아효였습니다. 이들은 다윗이 언약궤를 옮겨올 때 언약궤의 앞뒤에서 호위하며 수레를 몰고 따를 정도로 궤를 모시는 일에 끝까지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러기에 도중에 소가 뛰어서 수레가 흔들리며 언약궤가 땅에 떨어지려고 하자 빨리 손을 내밀어 궤를 붙들었던 것입니다. 언약궤를 존귀히 여긴다면 그것이 땅에 굴러 떨어지도록 방관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만큼 웃사는 언약궤를 모시는 일에 있어서 정성이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은 웃사를 치셨습니다. 열심은 지극했지마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는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고핫의 자손일지라도 손댈 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함부로 붙든 것은 웃사의 큰 실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열심은 반드시 지식을 동반해야 합니다(롬 10:2). 자기의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삿17:6). (3) 전공(前功)은 금비(今非)를 속량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비록 실수였다고 치더라도 오랫동안 언약궤를 모신 아비나답의 집에 대한 대우로서는 너무 가혹한 보응이 아니냐고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어제의 공로가 오늘의 과오를 속량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겐 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목적을 내세워 악한 법정을 미화하거나, 열심을 빙자하며 무지를 감행하거나, 전공을 믿고 오늘을 그르치기를 능사로 한다면 우리 자신도 베레스 웃사의 운명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에 있어서도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방심해서는 안 되며, 오로지 말씀대로 준행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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