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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발의 신관과 인생관 (욥 1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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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발은 욥의 잘못을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 말이 많다고 책망합니다. 말이 많으니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로우냐고 책망했습니다. 욥이 말을 많이 한 것은 인격이 천해서가 아닙니다. 친구들의 정죄에 대하여 답변하자니 말이 많아진 것 뿐입니다. 둘째, 욥이 자기 결백을 주장하는 것을 책망합니다. 욥은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지 아니했습니다. 다만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그런 죄인은 아니다”라고 대답했을 뿐입니다. 욥 9:1에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하며 욥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1. 소발의 신관 7절에 “네가 어찌 능히 하나님을 온전히 알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여기 주목할 것은 “하나님을 어찌 알겠느냐?”가 아니고, “어찌 온전히 알겠느냐?” 입니다. 고전 13:12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수학은 방정식에 의하여 풀이됩니다. 차원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차원의 세계가 있고, 이차원의 세계가 있으며, 삼차원의 세계가 있습니다. 각자의 구조와 구성요소가 다릅니다. 차원이 높을수록 더 복잡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의 차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각 차원의 문제는 각 차원의 것으로써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모든 문제는 그것이 소속되어 있는 차원이 있습니다. 무생물, 물체, 식물 등의 세계는 일차원입니다. 동물적인 생활을 하는 자는 이차원적인 세계의 존재들입니다. 삼차원의 존재는 주체의식을 가지고 자유와 도덕을 알고 어떤 이상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종교의 세계는 이 모든 차원을 넘는 고차원적 세계입니다. 신의 차원이란 앞서 말한 모두 차원을 초월해 있는 차원이며 동시에 그것이 앞서 말한 여러 차원을 포함하고 그것을 지배하고 그것의 가능성의 근거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일차원의 세계에서 고차원의 세계까지는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차원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의 차원에는 신만이 알 수 있고 하나님 만이 그 신비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욥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황금률로 생각하던 “선한 사람은 흥하고 악한 사람은 망한다”는 것이 그대로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욥은 고민했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 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나아만 사람 소발이 욥을 꾸짖어 하는 말이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욥의 어리석은 생각을 완전히 깨우쳐주는 명답 중의 명답입니다. 욥의 과오는 인간의 차원에서, 신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을 판단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묘를 인간의 줄자로 측량하려고 했습니다. 오묘란 말은 “하나님의 깊은 일”이란 뜻입니다. 깊은 곳에 있는 신의 진리를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로 바닷물을 측량하려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물은 되나 말로 측량해야 합니다. 자는 길이를 측량할 수 있으나 물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어리석은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전능자가 소유하고 사용하는 지혜의 범위를 인간은 도저히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자꾸 알려고 했습니다. 상대적인 존재요, 무능자인 인간이 절대자이시고 전능자의 지혜를 알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려고 하다가 되지 않으니 안 된다고 불평을 터뜨려 놓았습니다. 하늘보다 더 높은 하나님을 어찌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십니다. 그런데 욥은 그러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음부보다 더 깊음 곳에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부를 이 지상에서 제일 깊은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욥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못 간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의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습니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욥은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잘 안되자 불평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욥의 과오는 자기의 능력의 한계선을 정확하게 인식 못했고, 신의 차원에 속하는 일을 인간의 차원에서 풀어 보려고 한데 있습니다. 그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2. 소발의 인생관 인생은 들나귀 새끼로 보았습니다. 나귀는 훈련시키기 어럽습니다. 개는 훈련을 잘 받습니다. 목회 중에 깨달은 바는 나 자신을 비롯해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가 심히 어럽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들나귀처럼 보았다는 것은 그만큼 길들이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쓸모없는 인간도 귀하게 쓰여지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는 생활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롬 1:24-28에 보면 인간의 마음을 인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큰 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사 죄 가운데 멸망당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생각대로 살기보다 “주님이시여, 당신이 내 마음을 지배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 완전히 항복해야 합니다. 14절 이하에는 회개하는 자가 받는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 장막”이란 마음, 가정, 교회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죄가 들어 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항상 충만한 가운데 죽음 앞에서도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가정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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