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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발에 대한 계속적 답변 (욥 1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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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자기 자신의 회개와 구원의 진리를 묻게 됩니다. 본 장은 로마서를 방불케 합니다. 1. 욥의 소망(1-13절) 철학자들은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도 만사를 아는 것처럼 말할 때가 있습니다. 세 친구는 철학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성으로 사리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몰랐습니다. 유일한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쏘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고 했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붙들지 못한 철학자들은 쓸모 없는 의족과 같습니다. 의사도 자기의 영적인 병은 고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했듯이, 영혼의 병은 그 영혼을 지으신 분이 아니면 고칠 수가 없습니다. 3절에 “참으로 나는 권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하는 것은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난제가 생기면 하나님 보다 사람과 말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해결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시 109:2-4에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 또 애원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고 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창 32:24에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기도함으로 모든 난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소발은 하나님께서 욥을 향하여 입을 여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아는 데 있어서 소발보다 못하지 않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2절). 욥의 친구들은 공공연히 그를 도와주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욥에게 “쓸데 없는 의원이었습니다”, 4절에 그는 그들을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욥에게 전혀 사실이 아닌 말을 부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의 진상을 진단할 수 없는 의원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그들의 무지를 알고 “잠잠하게 된다”면 그것이 더욱 많은 지혜일 것입니다(5절). 욥의 친구들은 욥과 변론하려 했고 그들로 하여금 지금 욥의 변명을 듣고자 합니다(6절).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쟁논합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 속으로 사람을 차별대우 하는 것 때문에 틀림없이 그들을 책망하실 것입니다(9-10절). 그들은 하나님의 종을 다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11절). 그들의 격언에서 재같은 속담이요 그들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입니다(12절). 너희들은 잠잠하는 것이 좋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할런지 내가 당하리라(13절)고 했습니다. 2. 욥의 신앙적 모험 욥은 소발의 태도에 완전히 실망을 하고 믿음의 절망적인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좌우간 그는 그의 생명을 그의 장중에 두신 하나님의 인격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를 실패하실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할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 같은 권능자 앞에서 그의 행위를 주장할 것입니다(15절). 그리고 주님 자신은 그의 구원이 될 것입니다. 그는 사곡한 자는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할 것을 확신하고(16절), 그의 친구들이 들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명령하는 이유가 뭔가를 캐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여겨지는가를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러나 스스로 의로운 줄을 압니다(17-18절). 18절에서 욥의 신앙의 대상이 확실해졌습니다. 그는 오늘 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욥의 믿음은 시련받은 믿음이었습니다. 욥은 신앙의 대상이 확실했고 욥은 환란으로 그 신앙이 시련을 받았고, 그리하여 욥의 신앙은 승리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성경은 욥을 의인이라고 인정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의인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입니다. 주께서 마 18:3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한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아이들은 전부 의인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닙니다. 모태에서 잉태될 때부터 원죄가 있음으로 유아도 죽습니다. 다윗이 잉태될 때 죄 가운데서 잉태되었다는 말이 그 뜻입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했습니다. 히 11:5에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못하고 옮기웠으니”라고 했는데 그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속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창 15:6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여기셨기에 그는 율법이 오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사 1:18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속죄해 주는 복음입니다. 바울은 빌 3:9에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리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믿음이 아니고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에게 꼭 요구하는 두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에게 외치기를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업으로 나를 두렵게 마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21-22절)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께 드리는 욥의 간곡한 호소(20-28절) (1) 무엇이 죄입니까?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데 거기에 달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눅 10:31-32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중에서 등장하는 제사장 레위인은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은 이웃을 사랑치 않은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도와주어야 할 사람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약 4:17에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고 했습니다. 육신이 약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치 못함이 죄가 됩니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죄가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무조건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협조자가 아니라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죄를 아는 것은 불행이 아니고 행복입니다. 병자체는 불행이나 병의 근원을 아는 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병을 모르면 치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죄를 어떤 방법으로 알려줍니까? 첫째, 성경으로 알려줍니다. 객관적으로 알려줍니다. 둘째, 성령의 조명으로 죄를 알려줍니다. 주관적으로 알게 하여 주십니다. 요 16:8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습니다. (3) 욥의 호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이러한 죄악이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일까?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고 그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는 것일까?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끊임없이 마른 검불을 따르시는 걸까(24-25절)라고 했습니다. 시 13:1에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했고, 시 22:1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동행해 온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린 고통을 깨닫게 됩니다. 욥은 자기를 낙엽으로 비유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를 진흙에 비유했습니다. 우주인은 광활한 우주 중에 지구가 제일 좋은 곳이라고 외쳤습니다. 창조 면으로 볼 때 인간은 작은 존재이고 추악하고 타락한 죄인입니다. 마 12:20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껴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하였듯이 하나님은 인간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기 원합니다. 26절에 “자기의 괴로운 일들 곧 지은 죄를 하나님께서 기록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계 20:12에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성경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했으며, 롬 8:1에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그가 어렸을 때의 마음을 생각해 보고 회고합니다. 모든 것을 통찰해 보시는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어렸을 때 지은 죄의 값을 받게 하시려는 걸까?”하고 고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을 착고에 채우시고 그의 모든 길을 엄밀히 살피십니다. 말하자면 그의 발의 발바닥에 경계선을 긋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발걸음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의가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고 따로 팽개쳐지기에 알맞은 좀 먹은 의복같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서 이 무서운 고통을 겪을만한 어떤 명확한 불법도 알지 못하고 짓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이 고통이 왜 내게 닥치고 있는지 깨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요 8:32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죄를 용서함받고 자유 얻을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보혈만이 소망인 줄을 확신하고 십자가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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