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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연계와 인간계의 교란 (욥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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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빌닷은 심한 말로 불쌍한 욥을 향하여 쏘아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현명하고 선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욥에게 고통을 더 하고자 하는 사탄의 계획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빌닷은 엘리바스처럼 지루하고 긴 말로 욥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욥의 변론은 세 친구가 들리기에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께 모독으로 들렸고 이단으로 들렸습니다. 욥이 지나간 변론에서 벌받을 감정을 건드린 것이 한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1) 욥은 그 친구들을 번뇌케 하는 위안자(16:2), 조롱군들(17:2)이라, 눈 먼 위인들이라(17:4-10) 하여 비난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욥은 자기는 의롭고 무죄하며 깨끗하고(17:8-9),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은 불경건하고(17:6-8), 잔인한 자들로 여겼습니다(17:5). (2) 하나님께 대하여 불경스러운 말을 하였고 그가 진로하여 자기를 쫓으니(16:9), “땅아 내 편을 들라” (16:18)고 했습니다. 이러한 욥의 태도는 빌닷의 의문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보기에 욥은 자기의 무죄한 생각에 열중하여 남들을 부정한 짐승같이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찢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분에 못이겨 자기를 찌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아무리 자기의 무죄를 천지에 호소해도 자연의 질서는 죄를 벌할 것이요 인간의 도덕적 양심은 악을 배척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1. 빌닷은 긴 말로 욥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2절에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2절 처음에 “너희가”란 2인칭 복수 대명사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빌닷은 지금 욥 한 사람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도 물론 2인칭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70인 역에는 욥을 가리키는 2인칭 단수 대명사로 나옵니다. 욥기의 구조로 보아서는 단수가 옳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말을 시작할 때는 으레히 욥 한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늘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복수가 옳다면 우리는 빌닷이 다만 욥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욥 주위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다른 친구들에게까지 향해서 말했거나 욥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빌닷은 충분하게 강력한 토론을 전개시키지 못한 엘리바스와 소발을 포함하여 욥에게 말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여기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욥의 편을 들어 이야기하는 자들을 책망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황폐하고 천한 상태에 있음으로 거의 한 마디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빌닷은 욥이 자기의 말에 주위를 기울이지 않자 책망했습니다. 이것은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합당한 말을 할지라도 그것을 듣는 자가 관심을 가지고 듣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해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듣기도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빌닷이 욥을 책망함(3절) 3절에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겨서 부정하게 보느냐”고 말을 합니다. 17:4에 깨닫지 못한 자라고 했는데 자신을 짐승 취급했다고 욥은 친구들에게 “사람은 귀한 존재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사색하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전 7:14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했습니다. 벧후 2:12에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짐승같은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짐승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물인 것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기에 책망받아 마땅합니다. 사람은 인격자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하면 돼지만 못합니다. 인생이 생의 제일되는 목적을 잃어버리면 동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본문에 빌닷은 욥이 자기 친구들의 제안을 거만하게 멸시하고 무시했다고 하여 그를 책망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빌닷은 욥이 격분하고 있는 것을 책망했습니다(4절) 4절에 “너는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로다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 했습니다. 빌닷이 제기한 근본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욥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만을 주장하기에 빌닷은 욥에게 하나님이 어찌 의롭지 않으며 네 생각대로 창조질서가 움직여져야 하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있어서는 욥이 받는 것과 같은 고통을 의인이 받는다면 이는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생각도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험과 연단을 통하여 성도들을 굳세게 하시며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기도 합니다. 또한 빌닷은 욥이 교만하고 오만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흔들어 놓으려 한다고 책망했습니다.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연의 법칙이 바뀌고 통치의 원리가 변동될 리가 없습니다. 욥, 네가 없으면 세상이 설 수 없다고 생각하며, 욥 네가 막하면 모든 세상도 망하고 너와 함께 버림을 당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욥에게 힐책하였습니다. 빌닷은 욥에게 욥의 격렬한 원망에 대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느냐 하며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헛되지 않으시고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내게 잘 안맞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가장 잘 만드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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