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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의 의의 (욥 1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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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고통이 컸던 만큼 그 해답 또한 그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고통은 그 의미가 우리에게 가장 깊이 감추어져 있는 비의의 세계라는 점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기존의 철학이나 종교적 사유방법으로 고난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훌륭한 신학자들이었지만 욥의 고통문제 앞에 이르러서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을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일은 절대 금물이라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고통은 아무 까닭없이 임하기도 합니다. 결국 고통문제는 그 해답이 하나님에게만 있고 그 밖에는 아무 데서도 찾아낼 수 없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하나님께서는 그 해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에도 신앙은 최선의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문제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회로, 아니 하나님을 대면하도록 강요하는 기회로 인도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버텨 보려는 사람이 없는 소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 중에서 비로서 자기 존재의 미미함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것과 무지한 것인가를 그 때야 알려집니다. 하나님께서 단 한마디라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 나서서 대답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욥의 제사를 통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까지 비약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접할 때마다 욥이 고통을 벗는 날 고통의 의미를 깨달은 것처럼 고통이 다 끝난 때에라야 그 의미가 다 풀어질 것입니다. 세상 만사는 일방적으로 광명이라든가 암흑이라든가 선이라든가 악이라든가 즐겁다든가 괴롭다든가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광명과 암흑, 선과 악, 즐거움과 괴로움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많으냐 하는 질문에는 광명보다 암흑, 선보다 악,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더 많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많은 사람이 이 문제로 괴로워했습니다. 렘 12:1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질문하옵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라고 했으며, 합 1:13에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심으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를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시 73:1-5에 “나는 거의 실족하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여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런 심각한 문제에 대하여 욥기서를 통해서 해답을 얻고자 합니다. 1. 윤리적 견해 욥의 세 친구의 질문은 “이런 욥의 고난은 우연이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죄의 결과로 재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견해는 세 가지 뒷받침이 있습니다. (1) 과거의 경험이 이를 말합니다. 생각해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며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절). 세계 역사상 죄값으로 망해 버린 자가 많이 있고 의인이 보상받는 것을 욥의 세 친구들은 보았다고 이런 견해를 주장한 것입니다. (2) 전통적인 교훈입니다. 옛 사람이 그렇게 가르쳐 온 윤리적 가치입니다. 아무리 악이 눈 앞에서 판을 친다 하더라도 필경은 정의는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먹구름으로 가리우고 파도로 뒤덮힌다고 해도 그래도 구름 너머 저 하늘에는 태양이 여전히 비치고 있고,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도 자세히 하늘을 찾아보면 밤하늘을 비취는 한 두 개의 별이 하늘에 있다는 선인들의 교훈입니다. (3)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는 사람이 가히 측량할 수 없어도 하나님의 심판은 마침내 불의한 자에게 임한다는 진리입니다. 욥 11:7-13에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을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견해는 비단 욥 뿐만 아니라 성경 전반의 견해입니다. 출 23장, 레 26장, 신 28장, 시 1편, 37편, 사 58장, 렘 7장, 렘 31장, 겔 37장은 모두 이런 견해를 표명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였지만 그 민족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주저없이 징벌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선벌악의 결해가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모든 비극과 고난에 대한 만족할만한 해답이 못됩니다. 어떤 재난은 사회적인 연관성에서 당하는 재난이 있습니다. 아간 한 사람이 여리고 공략 때 범한 죄는 그 한 사람만이 죄값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형벌로 나타났습니다. 부모들이 지은 죄를 그들만이 아니라 그 자녀들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비극이었습니다. 자유당 천하 때 권력을 잡은 자들의 범죄는 하늘 높은 줄을 몰랐습니다. 3.15부정선거로 잔혹 무비한 끔찍한 죄악을 저지르면서 천하를 잡기는 했으나 참다 못해 일어난 젊은 사자들의 4.19혁명으로 하루 아침에 권좌에서 밀려날 뿐 아니라 영오의 몸이 되고 처형당했을 때 우리는 그 심판의 정당성에 가슴이 후련했다 하지만 어제까지도 그렇게 내밀고 자가용차 아니고서는 등교도 안하던 그 자녀들이 얼굴을 들고 학교에 다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 밖에도 나가지 못하던 정경이 우리 가슴을 미여지게 했습니다. 부모들은 죄값으로 벌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려니와 그 자녀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이 이다지도 가혹하다는 말입니까? 욥의 세 친구의 비난과 책망을 전력을 다해서 항변한 것은 이런 이유였던 것입니다. 2. 교육적 견해 시험은 죄 까닭이 아니라 그를 시련하여 더 위대한 신앙인이 되게 하고 더 위대한 의인이 되게 하기 위하여라는 견해입니다. 롬 5:3-4에 “우리가 환란 중에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고 했고, 약 1:2-3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고후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 삼층천에 가는 입신의 신비 체험을 가졌던 자이지만 그의 몸 안에는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어서 하나님께 없애주시기를 세 번 기도하였으나 하나님의 응답은 “네 은혜가 족하도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가지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는 고백입니다. 어떤 성도가 칼빈에게 질문하기를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왜 시험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칼빈의 답은 “만약 구원 얻은 후 믿는 자들에게 다시는 시험이나 시련이 없다면 모름지기 자기의 신앙이 좋아서, 자기의 기도가 좋아서, 자기의 생활이 좋아서인 줄로 알고 교만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저에게 때때로 시험과 가시를 주어 저의 신앙이 얼마나 무력하고 하잘 것 없는 가를 깨닫게 하여 그로 하여금 십자가의 주를 쳐다 보게 하고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이처럼 수난은 교육적 의미가 있습니다. 3. 사명 완수를 위한 수난 욥기의 서론에서 나오는 견해입니다. 무슨 까닭에 욥이 이렇게도 무서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를 천당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에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욥을 믿어주는 그 믿음이 저버림이 되지 않기 위하여 당하는 수난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를 볼 때 제자들이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이 제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예수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것은 이 사람이 지은 죄도 아니고 부모가 지은 죄도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으니 오소서” 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후에 살려주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것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창세기 마지막 장에 보면 야곱이 세상 떠나 장사한 후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두려워하여 요셉의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버지의 생전에는 아버지를 인하여 요셉이 그 형들에게 복수를 아니했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 요셉이 그 한을 풀리라 생각하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이 울면서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창 50:20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인들 그 형들에게 원한이 없었으랴마는 그 형들의 손을 통하여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 당한 너무도 큰 고난이 단순히 형들의 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 너무나도 큰 하나님의 섭리가 거기 있었음을 깨닫고 그 섭리가 7년 흉년에 이스라엘을 위시한 온 집안 가족의 구원을 위한 고난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4. 욥기서 본문은 우리에게 고난의 문제 해결은 이 세상에 없다는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이 철저한 고백은 욥이 땅 위에서 궁극적인 해결을 포기해 버리고 죽은 후 육체를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설 것을 고백했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지금은 거울 속에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궁극적 해결은 이 땅 위에는 없을 것이고 하늘나라에 갈 때만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완전한 해결을 못 보았다고 해서 회의에 빠져 신앙을 포기해야 하느냐? 아닙니다. 모든 사실은 우리를 신앙의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이 때가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의 문제가 열리리라 합니다. 그 중 아홉은 하나님이 해결의 열쇠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가 미해결로 남았다 하여 이 한 가지 때문에 이미 해결 본 아홉 가지를 버려야겠습니까? 결국 이 모든 사실들은 우리로 회의에 빠져 포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을 정의하여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욥기가 최후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고난의 문제에 대한 빛은 바로 이 신앙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올바른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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