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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후의 연설 (욥 3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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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엘리후는 그의 연설 벽두부터 욥을 향하여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엘리후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지혜의 신이 그를 사로잡았다는 것에 호소하여 자기 말은 다 옳은 것”이라고 스스로의 입장을 정당화합니다. 더우기 엘리후는 욥이 앞에서 한 말을 인용해 가면서 반박합니다. 이미 앞에서 욥은 하나님은 자기와 같은 사람이 아님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주의 막대기를 욥에게서 거두실 것과”, 9:32에 “주의 위엄으로 그를 두렵게 마실 것”을 간구였습니다. 엘리후는 자기는 욥과 똑같은 사람일 뿐 이상하고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은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는 욥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지음을 입었은즉” 욥을 두렵게 하지도 못하고 어떤 권세로 그를 누를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1. 엘리후의 발언의 태도 2절에 “내가 입을 여니”란 밀은 깊이 생각하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입으로 짓는 죄가 많습니다. 무책임한 말을 함부로 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성도는 속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은 대화중 무용한 말은 별로 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3절에 “신실한 말과 정직한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약 3:2에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말을 복음을 전하는 데만 전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갈 1:10에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만 한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엘리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해야 했습니다. 4절에 하나님께서 욥을 창조하신 것 같이 엘리후도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엘리후가 피조물이기는 하나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고 성령으로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5-6절은 인간의 평등사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평등사상은 역사적으로는 르네상스 이후 인격을 존중하면서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셨으니 평등한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사상에 근거를 두어야 참 평등이 이루어집니다. 7절은 인간의 권위도 똑 같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인간은 인간을 누르고 그 영혼까지 지배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 말씀으로만 권위를 키웠는데 지금은 사람의 말로 권위를 세우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권위와 인간의 권위를 동일시 해서는 안됩니다. 2. 엘리후가 욥의 잘못을 지적함(8-12절) 욥이 자기는 의롭다고 했습니다. 욥에게서는 사죄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욥을 죄인이라고 지적합니다. 욥은 의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가 없어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이 불신자의 모습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무조건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들어 욥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인간을 교훈하시는 방법(13-15절) 14절의 “한 번”과 “다시”라고 하는 말이 문자적으로만이 볼 때 “이런” 혹은 “저런”이란 뜻인데 이것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두가지” 방법을 의미하는 것인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숫자적 표현은 “어떤 수”에서든지 다 공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여기서 엘리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두 간지 방법, 즉 꿈이나 환상을 통한 방법과 고난을 통한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에는 꿈과 이상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창 20:6에 아비멜렉에게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즉 범하지 말라고 꿈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창 31:24에서 라반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는 것도, 창 41:1에 바로왕에게 7년 풍년이 들 것도, 단 4:5에 느브갓네살 왕이 금 우상 꿈을 꾼 것도, 창 37:5의 야곱에게도, 마 1:20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도,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박사에게 꿈을 준 것이 이 교훈입니다. 그러나 꿈이 다 교훈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믿음과 말씀 안에 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 교훈하시는 목적(16-23절) (1) 범죄치 못하도록 하십니다. 바로 왕을 징계하심도, 아람 왕을 징계하심도, 하나님께서 악을 그대로 두신다면 피차 만연해서 역사가 계속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고민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17절에 죄도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특히 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얍복강을 건널 때 형님께 선물로 형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환도뼈가 부러지고서는 하나님께 두 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수단과 꾀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결과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성도가 되려면 야곱의 얍복강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처분에 맡기시기 바랍니다. 5. 교훈의 결과(24-28절) 어려움에서 건져주십니다. 25절은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아 새로 지음을 받는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이 부드럽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게 되고, 보좌 앞에 나아가야만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시 51:12에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고 자천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했습니다.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더라도 내 구원은 예수님의 속죄로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6. 엘리후의 권면(29-33절) 엘리후는 욥더러 자기 말을 심사숙고 해 볼 것과 하나님께서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사람에게 행하신다는 사실을 심사숙고 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엘리후가 본대로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으로 “생명의 빛을 보고” 생을 즐기게 하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욥을 이롭게 하려는 의도는 하나님 앞에서 욥의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욕구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본문 욥 33:19-28절 말씀은 구약 성서의 계시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서 그는 아주 극적인 상상력을 구사하면서 죽음과 삶의 무의미성 앞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인간의 철저한 절망을 여실히 도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와 같은 절망상태와 대조시켜 천사의 중계역활을 내다 보고 있습니다. 고난받는 자를 위해 “대속물을 얻었다”고 하는 그 천사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의로운 존재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해석자”로 등장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변호한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엘리후는 믿음의 사람이요 사랑과 겸손을 가진 자였습니다. 여러분도 엘리후와 같은 지혜자와 능력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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