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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 지혜 (욥 39: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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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무의식 중에 하나님은 자비하지 않은다고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다 듣고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각종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이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장마가 몰려오면 뱀은 나무 위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나무 위에 있는 뱀을 보면 사람들은 이제 장마비가 올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집에 불이 날 때쯤 되면 그 집 안에 살고 있는 저들이 모두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작은 연어는 여러해 동안 바다에서 살다가 자기의 고향인 강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출생한 바로 그 자리로 여행을 한답니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찾아올 수 있겠습니까? 과학자들의 말에 의한다면 그 연어를 다른 강줄기에 갖다 놓으면 가는 길이 즉시 틀린 줄 알고 정확한 목표지로 다시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뱀장어는 어디에 살든지 다 한 자리에 모입니다. 즉 “바뮤다” 근해의 깊은 바다에 모여서 새끼를 낳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 새끼들은 배운 바가 없지만 어버이가 온 바다로 찾아가 그 부근바다에서 다시 어머니가 살던 연못이나 호수로 찾아갑니다. 미국의 뱀장어가 구라파에서 발견된 바가 없고, 구라파 뱀장어가 미국 근해에 사는 법도 없습니다. 특히 구라파 뱀장어는 1년 이상 수명이 깁니다.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방향을 알 수 있습니까? 또 말벌은 메뚜기를 먹고 삽니다. 메뚜기 어딘가를 침으로 쏘면 메뚜기는 죽지 않고 정신을 잃게 되는데 땅에 구멍을 파고 그 메뚜기를 저장해 놓습니다. 그리고 말벌은 적당한 곳에 알을 낳고 어디론가 날아가 죽고 맙니다. 그 후 말벌 새끼들이 부화되어 저장된 메뚜기를 산 채로 조금씩 뜯어 먹고 삽니다. 한 번도 본 바도 없고, 배운 바도 없는 말벌은 메뚜기를 잡아 저장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니까?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지혜이며 본능인 것입니다. 렘 8:7에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라고 했습니다. 가고 오는 시기를 어떻게 압니까? 이런 지식이 어디서 생겼습니까? 지혜란 습득으로 얻어지는 것이 있고, 하나님께서 선천적으로 주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날 과학자들은 이런 것을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들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골 2:3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고 했고, 렘 51:15에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라고 했으며, 잠 21:30에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 앞에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벌레보다 못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1. 타조에 관한 설명(13-18절) 타조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타조의 변덕성과 무자비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타조 자체의 외모의 흉칙함과 알을 아무 데나 까버리고는 돌보지 않는 어리석음과 무자비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쓸모없는 추물에게는 어울리지도 않게 강한 힘과 무서운 속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1) 타조는 알을 어떻게 노출시킵니까? 타조는 제비나 참새처럼 은밀한 장소로 둥지를 짖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서서 알을 낳고 새끼를 깝니다. 모든 동물들은 자기 종족 보호의 본능으로 자기 새끼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타조는 그러하지 않습니다. 자기 새끼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모래와 햇빛이 그들을 부화시켜 준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모래와 태양이 그 어미를 대신해 줍니다. 왜냐하면 그 어미가 알을 따뜻이 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14절). 여행자나 들 짐승이 알을 해칠 염려도 있습니다. 그러나 타조들은 이것들을 개의치 않고 알만 낳으면 그의 임무를 다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여전히 타조는 앞에서 부화되어 종족을 유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타조가 제 알을 보살피지 않음 같이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영혼에 대한 양식을 준비하지도 아니하며 자기 영혼이 안전하도록 동우리를 짓지도 않습니다. 자기 영혼을 사탄과 그 유혹에 넘겨 버립니다. 이들은 참으로 미련한 자들이요 하나님은 사랑이 없다면 다 멸망하고 말 존재들입니다. (2) 타조는 자신에 대해서는 매우 염려합니다. 타조는 제가 낳은 알을 위험에 처하게 내버려두나, 자기 자신이 위험에 휩싸이게 되면 어떤 생물보다 더 위험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게 됩니다. 온 힘을 기울여 탈출합니다(18절). 위기를 맞으면 타조는 그 날개를 높이 쳐들며 전 속력으로 질주하여 그 누구도 따라가 잡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타조도 다른 것에 있어서는 부족하나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의지는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2. 말에 대한 설명(19-25절) 여기서 욥기의 저자는 말에 관하여 극적인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나타난 이미지의 특별한 의미는 전쟁터에 나타난 말의 비상한 행동에 있습니다. 그 속 뜻은 욥으로서는 그러한 말에게 명령할 수도 없고, 말이 그와 같은 이상스러운 성격과 어거할 수 없는 동물의 그 난폭한 힘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욥의 교만함을 꺾으시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 어떤 동물보다 힘이 떨어지지 아니하면서도 아주 길이 들어 사람에게 봉사하는 동물 속에서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십니다. 말은 아주 힘이 세며 기개가 강합니다(19절). 하나님께서 말에게 그 힘을 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모든 능력의 원천이십니다. 욥이 말에게 힘을 준 것은 아닙니다. 달라거나 끌거나 모반하는 일에 있어서 보통 사람을 섬기는 동물중 말보다 더 힘이 센 것은 없으며 위험에 직면하여 뒤로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말과 같은 충복을 두게 된 것은 큰 행운입니다. 그렇지만 말에게 이러한 힘을 준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또 말에게서는 전투장에서 돌진하면서 꺾이지 않는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말은 대지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달립니다. 사람을 위하여 말은 그 힘을 사용합니다. 말은 이와 같이 말의 힘과 휘날리는 갈기, 전쟁에서도 두려움없이 앞으로 전진하는 용맹 등은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고유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은 이를 통해서 자신이 행한 어리석은 말을 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 매와 독수리에 대한 설명(26-30절) 본문은 독수리같은 무서운 날 짐승의 버릇과 같은 피조물들 속에 있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요소를 상기시키면서 서서히 끝납니다. 공중의 새는 지상의 짐승과 함께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지혜에 대한 증거물입니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두 가지 위험있는 조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 매(26절) 매는 굉장한 힘과 슬기를 지닌 맹금류입니다. 신속하고 강한 힘을 가지고 남쪽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어찌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겠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으로서는 이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2) 독수리 독수리는 조류의 왕으로써 역시 맹금류에 속합니다. 그 독수리에게 먹이를 허락하신다는 사실은, 아니 그에게 그런 먹이를 잡아 먹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고 다만 놀랄 뿐입니다. 1) 독수리는 높이 날습니다. 어떤 새도 독수리 만큼 높이 솟아 오를 수 없고 그 만큼 강한 날개를 가진 것도 없고 그것 만큼 햇빛에 견디어 내는 새도 없습니다. 누가 독수리를 이토록 날개했느냐는 것이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독수리는 날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2) 보금자리 독수리의 집은 성이요, 요새지입니다. 높은 바위의 절벽에 집을 만듭니다. 그래서 자기와 자기 새끼를 다른 것에 의한 위험권 밖으로 벗어나 안전하게 거합니다. 이런 지혜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3) 독수리의 눈 그의 눈은 멀리 바라봅니다. 그 눈이 멀리 바라보기는 하나 위를 향하지 않고 아래를 향하는데 이는 움킬 먹이를 찾기 위함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독수리는 위선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종교적 직업에서 조차 위선자는 외견상 하늘로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눈은 땅 위의 먹이, 곧 세속적인 이익을 향해 머뭅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먹일 때도 살아있는 동물을 먹이로 주어 피를 빨도록 가르칩니다. 독수리는 사람의 시체도 먹이로 삼습니다. “살륙당한 자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독수리의 이런 본능을 언급했습니다. 마 24:28에 “주검이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독수리가 보입니다”라고 했듯이 어느 생물이든지 자기의 고유한 먹이가 있는 곳을 향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물에게 그 먹이를 제공해 주시는 분께서 그들 안에 그런 식성도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예를 통하여 하나님의 욥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셨고 그로 하여금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이 이제 하나님의 지혜 앞에 무릎꿇고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항상 하나님의 지혜 안에 거하여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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