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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녁기도와 의로운 생활과의 관계 (시 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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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무한히 흐르는 세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유수와 같이 흘러가는 세월의 기본단위는 무엇입니까? 단위라고 하면 명확한 한계와 구분을 지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월을 가장 명확하게 구분지어 주는 단위는 년, 월, 일, 시, 분, 초중에 어는 것이겠습니까? 세월의 기본단위는 날입니다. 날은 밤과 낮의 명확한 구분을 지어줍니다. 해지는 시점이 있고, 해 뜨는 시점이 있어 날고 날의 한계를 분명하게 그어줍니다. 시와 분과 초에는 시간을 구분하는 한계선이 없습니다. 주와 월과 햇수는 날수를 기준으로 샘합니다. 그러므로 날이 시간과 세월의 기본단위가 됩니다. 사람은 하루라는 날을 단위로 무한한 세월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루에는 시작이 있고, 아침이 있습니다. 학업은 3-4년 세월을 거쳐서야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사업은 10-20년의 세월을 거쳐서야 하나의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세월의 기본단위인 매일 매일 매듭을 지어 나가야 합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대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듭지어진 하루하루의 축적이지 10년을 하나의 한 단계로 볼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책장의 책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기듯 그날그날을 절도 있게 가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루를 맞이할 때마다 출발선에 선 선수와 같은 기분으로 결승점에 골인하는 경기자의 기분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하루는 언제 시작해서 언제 마칩니까? 하루의 출발점은 어느 시간입니까? 아침입니까? 저녁입니까? 아니면 자정입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시간의 원점인 천지창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역사의 시작 천지창조의 첫날은 아침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저녁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우주의 첫날은 광명에서 시작되었습니까? 흑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역사의 첫째 날은 흑암에서 시작했습니다. 창조의 날을 말할 때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리라 했지,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리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사상으로 사는 유대인들은 하루의 시작을 저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도 저녁부터 지냈던 것입니다. 하루의 시작은 저녁입니다. 하루의 출발은 저녁입니다. 아침은 하루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그날 할 일을 준비합니다. 저녁을 하루의 출발로 생각하는 사람은 저녁에 자기 전에 날이 밝으면 할 일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시간관념이 다르면 생활이념도 다릅니다. 신자의 하루의 출발과 시작이 저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저녁을 하루의 시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녁에 하루 동안의 반성을 하고 다음 날을 위한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저녁은 기도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이렇게 영혼이 깨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깨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나님과 만남의 소중한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신이 잠들고, 우리 영혼이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과의 영교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본문 1절은 다윗의 저녁 기도인데 “내 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대화의 기도입니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에게 향하여 부르짖어 대화를 요청하는 기도를 드렸고 그 후에 답답한 사정, 억울한 사정도 아뢰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 마음을 깨우지도 않고, 나 혼자 주워 삼키면 공기만 시끄럽게 할 뿐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 기도를 들어달라는 기도, 기도를 위한 기도, 기도 전에 드리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한다고 엎드렸다가 잠들어버리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내게로 향하기도 전에 내 기도는 끝나버리는 때가 허다합니다. 이런 기도는 기도했다는 말뿐이요, 하나님이 들으신 기도는 못됩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한 스펄젼의 설교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았거든 잠자리에 들 생각을 말아라”, “주님의 얼굴에 노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누운들 잠이 오냐”, “눈물로 시트를 씻어라, 눈물로 씻은 시트 위에서 이루는 잠은 단잠을 자리라” 이것은 고요한 저녁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함을 깨우쳐 주는 글귀들입니다. 내 입의 웃음소리, 근심소리 그치고 세상의 소음 잡음 다 그쳤을 저녁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봅시다. 사무엘도 삼라만상이 잠든 고요한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저녁의 기도는 모르고 있던 일을 깨닫게 됩니다. 잊었던 일을 기억케 됩니다. 나는 잘하고 그는 잘못했다고 생각했던 일을, 그가 잘했고 잘못한 것은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때 묻은 옷을 그냥 걸친 채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됩니다. 직장에서 돌아오면 손발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그날 더렵혀진 것은 그날 씻어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줄 것은 갚고, 용서할 것은 용서함으로 하루를 말끔히 청산해야 합니다. 머리맡에 쓰레기를 둔 채로 누우면 꿈자리가 어지럽습니다. 마음의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누우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잠을 자도 고통의 잠을 잡니다. 아론의 제사장들은 하루에 두 번씩 제사를 드리며 아침에도 양 한 마리, 저녁에도 양 한 마리를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침의 제사가 헌신과 서원의 제사라면, 저녁에 드리는 제사는 사죄와 화목의 제사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 저녁 제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사죄와 화목의 제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태울 것은 태우고, 씻을 것은 씻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드시기 바랍니다. 저녁에는 큰 기도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깊이 있는 기도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것, 정욕적인 것, 육신의 것을 구하고 “아멘”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중을 더듬는 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기도하고, 주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 위하여 기도하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회와 총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선교사와 옥중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북한 선교와 중공, 아시아의 선교, 세계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부분적으로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총괄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신약과 종말에 이르는 한국과 아시아와 세계에 이르는 지상에서 천상에 이르는 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육신의 배가 부르면 잠이 오듯이 영혼의 만족, 심령의 감사가 있을 때 단잠을 자게 됩니다. 다윗은 심신이 만족한 상태에서 단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성도에게는 잠도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자는 잠은 그 잠이 심히 담니다. 성경은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단잠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렇다고 소 같은 미련한 잠도 성도의 잠은 아닙니다. 천지를 모르고 자는 잠은 사람의 잠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랑이 맞으러 올 때 일어나지 못합니다. 잠든 중에 주님이 오신다 할지라도 일어나 맞으러 나갈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었는지 매일 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국의 순교자 리드웨이는 순교하기 전날 밤에 동생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동생은 흐느껴 울면서 형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밤을 같이 위로하며 지새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리드웨이는 “나는 오늘밤 평안히 자고, 내일은 주님 앞에 가련다.”고 말했습니다. 내일은 주님 앞에, 오늘밤은 이 세상에서 편히 잘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러운 믿음의 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러한 믿음의 잠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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