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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생명의 의 (시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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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과학과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혁명은 인류를 장구한 역사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이제 바야흐로 과학기술은 세계를 지배하는 권위의 힘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수준은 2세기 전 제왕들의 생활보다 더 찬란하고 다채롭고 호화롭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만큼 진실해지며 아름답다고 선하여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인류의 종착역이 희망의 세계일지 또는 파멸의 세계일지…… 진지하게 반성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쏘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아테네 청년들에게 외침으로 모든 문제 해결의 근본은 자아인식에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문제는 “나”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정치, 사회, 경제, 과학, 인류, 세계 운명 등을 논하나 이 모든 문제에 앞서서 보다 급하고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신의 문제일 것입니다. 물론 외계에 대한 문제도 흥미가 없는 바가 아니지만 그것은 인간 “나”라는 관계를 기초로 생각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하시며 “나”의 생을 우선적으로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었습니다. 1. 그러나 사람에 따라 나의 생을 무의미하게 보는 사람이 있습니 다 프랑스의 작가 안드레 모로와는 “삶이란 무의미한 사실이다. 죽음은 삶이 모호하고 무의미 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이다”라고 하였고,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워는 “사람은 살면 살수록 마이너스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견해들을 집약한다면 “우리의 생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발생되는 사건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자고 깨고, 먹고 마시고, 오고 가고, 공부하고 놀고, 다투고 노력하는 사건들, 경제, 정치, 사회, 교육, 위생, 회의, 선거, 전쟁 등???……. 이 모든 것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이를 옛사람들은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오늘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는가?”,“뭐 살고 싶어 사는가?” 하는 생을 무의미한 것으로 알고 용기와 결단과 희망 없이 생을 어물어물 사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의 세계는 이 같은 무의미주의와 허무주의가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현대의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2. 이런 물음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은 어떤 해답을 줍니까? 사실 삶이란 표면상으로 본다면 무의미하고 단순히 육체적인 생존의 한 토막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삶은 높고 깊은 차원이 있습니다. 즉 사랑이라든가, 진실이라든가, 소망, 정의, 영생, 신념, 자유, 용기 등……. 이런 덕목을 통하여 삶의 꿈을 실현하는 참 의미가 있는 세계입니다. 본문 5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진 존재”가 인간이요, 이것이 생의 의미, 바로 그것입니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은 원자와 공간이 우연히 결합된 물질적 존재”라고 하였으나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존귀로 관을 씌운 그런 귀한 존재이며 이러한 존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모든 영화와 존귀를 버리시고 육을 입고 인간 세계에 내려오시기까지 하시는, 이런 적극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깊은 의미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같은 생의 시련 속에 살고 고독과 고통 속에서 산다고 해도 생은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발견하는 자만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세는 40년의 광야의 시련과 고독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고, 존번연은 12년의 옥살이에서 천로역정이란 대 저서를 썼으며, 존밀톤은 실명 후 실낙원을 기록하였으며,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된 후에 대곡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학문적으로만 구할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궁극적인 해답을 찾는 몸부림으로 구하고 찾고 진리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참된 문제와 모습에 부딪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세 가지 방향으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1) 관계성이란 차원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너와의 관계성, 자연물과의 관계성……. 이런 관계 안에 얽혀져 짜여져 있는 복합성 속에서 삶의 의미는 찾아지는 것입니다. 관계성의 표준을 어디다 둘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 옆으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여, 아래로는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까지도 의의를 부여하시는 예수님의 관계성 속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로서 생의 의의와 보람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나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발견됩니다. 인간은 “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심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는 너무 약하고 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내놓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싫어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 후에 무화과나무 밑에 숨었듯이, 자아의 자각을 회피하는 현대인들에게 진실 된 자기를 발견하고 드러내어 놓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나, 사회 속에 선 나, 가정 속의 나, 직장 속의 나…….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참 삶의 길이 선택되고 모색되며 결심과 노력, 인내, 결실, 기쁨, 최선이 나오며 생의 참 의의를 발견케 됩니다. (3) 창조의 역사에 동참할 때 더 뚜렷이 삶의 참 의의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으로 삶의 의의를 발견할 것입니까? 일하는 곳에서, 창조의 역사에 참여하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 선 “나”, 이웃 속에 있는 “나”, 자연 속에 있는 “나”의 존재를 발견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창조물과 세상을 관리하는 관리인으로서 맡기신 것입니다. “다스리고 정복하라”(창 1:28) 인간은 인간의 역사를 창조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의 세계에 참여시키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오늘 이 지상에 우리의 생을 영위하도록 허락하신 목적일 것입니다. 결론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깊고 높고 넓은 세계와의 관계, 이웃인 너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외면하고, 우리 자신의 인간됨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또한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에 무관심한다면 본문 시 8편에 있는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무엇이관대”라는 판단이 읊어질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만 하게 된다면 그는 보람찬 삶을 지닌 위대한 존재가 됨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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