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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악자들의 사악함 (시 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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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란 때에 숨으시나이까?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에게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의심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주는 본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혼이 주리고 목마른 것 같이 느끼나 실상 이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증표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자는 이런 느낌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2절에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를 핍박하는 자의 죄를 묘사합니다. 그는 교만한 자이며 그 교만은 모든 악한 행위의 근본입니다. 교만이 있기에 남을 무시하기도 하며,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파렴치한 사람이 됩니다. 파렴치한 자는 사욕을 가리지 않고 오히려 폭로하며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3절에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마음의 소욕은 정욕을 가리킵니다. 악인은 정욕을 제거하지 않고 도리어 칭찬을 돋우어 줍니다. 따라서 그는 얼마든지 그 정욕을 채우려는 탐심을 부립니다. 그러므로 그는 “탐리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그는 정욕대로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여호와를 떠나기 좋아합니다. 그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합니다. 또한 그는 자기의 능력과 성공을 교만스럽게 자랑합니다. 그는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그가 원하는 것을 핼할 수 있음을 자랑하고 그가 원하던 모든 것을 이루고 그 목표를 수행한 것을 자랑합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라고 선포한 자들을 지혜로운 자라고 칭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서 큰 죄를 지은 자로 정죄한 자들을 무죄한 자라고 합리화 합니다. 4절에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무엇이든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고 일을 저지릅니다. 그것을 그들의 정욕이 자신들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법보다 우월하다는 식으로 그들 멋대로 행하는 것을 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손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신앙인을 어리석은 자들로 비난합니다. 5절에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악인들이 그 마음의 소욕을 주장하고 실행함에 있어서 굳게 서서 변동하거나 회개하지 아니함을 가리킵니다. 악인은 그 길이 비록 자신에게 아무리 실증이 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힌다 해도 그것을 수고해 나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며 하나님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6절에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합니다. 악인은 “나는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뇌까리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그들 가까이 있을 심판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파멸은 가장 멀리 여기는 자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와 반대로 성도는 자기 생명이 한 개의 실오라기에 달린 듯이 위험성을 느끼면서 주님만 믿고 안심합니다. 7절에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의 혀는 위증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해악을 숨기고 있어서 그들과 무슨 일을 하던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들어서 행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남을 속이고 해를 끼치는 일을 그들의 목적에 도움이 되기만 하면 주저하지 않고 행합니다. 이것은 언뜻 보면 매우 유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그는 마귀에게서 속이는 것을 배웠고 또한 파괴하는 것도 배웠기 때문입니다. 8절에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농촌, 읍, 도시 어느 곳에서나 견고한 근거지를 은밀히 갖고 무죄한 자와 가련한 자를 해아며 안심하고 있던 자를 돌연히 해롭게 합니다. 이것은 잔악성의 극단입니다. 9절-10절에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끊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의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잔인하고 야만적입니다. 그들의 악의는 결코 그들을 격노케 한 적이 없는 “무죄한 자”,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고 또 그들을 이기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여지없이 표현됩니다. 그들은 가련한 자를 자기 그물에 끌어들여 그들을 파괴하고 그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둠이 빛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하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11절에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에게서 압박받은 하나님의 성도를 도와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 주셔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핍박자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까닭이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악인을 심판하시는 까닭이요, 핍박받는 자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까닭이요,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이 항상 안일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악인에 대한 정죄가 더 무겁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시 10편을 노래하고 간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사악한 자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우리 마음에 품어야 하며 압제 당하고 있는 자들의 비참함에 대해 따뜻한 동정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합당한 때에 하나님께서 해를 당한 자들을 구해 주시고 그 해를 기억하시리라는 확고한 마음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를 경건히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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