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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예배 (시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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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가 교황이 되고부터 로마 천주교회 안에는 과거 1900년 동안 누려보지 못했던 종교의 자유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천주교 안에서는 다방면으로 개혁이 단행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루터의 신학을 재평가 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성서와 교황의 무오설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신부와 수녀의 독신 제도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에는 산아제한을 불허하는 교서를 발표하자 이에 항의하는 데모가 일어났고 적어도 수천 명의 신부들이 성복을 벗어버리고 결혼했습니다. 미사에 라틴어 사용을 포기하고 자기 나라 말로 사용토록 하는 등 여러 가지 개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개신교 교회 안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 면에서는 인본주의와 과학주의를 병합하는 경향이 있어 하나님 죽음의 신학과 또는 세속신학에서 지나치게 인간의 능력을 강조한 결과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는 경향이 생기어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는 목사, 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예언자적 임무와 또한 목회자로서 임무를 망각하고 교회 정치에 동분서주하고 공명심과 명예의 노예가 되었으며, 교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러 교회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만나기 위해, 취직을 부탁하기 위해,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신랑감을 고르기 위해, 교회를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예배가 강연회 같은 느낌을 줍니다. 교회가 이 시대에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제시해 주어야 하며, 또한 허물어 가는 도덕을 바로 세워야 하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겸손히 그를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참 예배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른 길로 가야합니다. 본문 1절 말씀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거할 자 누구 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 오리까? 한 물음에 대한 대답이 나습니다. 이 시인의 대답에 의하면 긍정적인 자격으로서 첫째로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직하게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서 인생의 길을 간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위하여 계획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계획하신 길을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로 걷는다는 단어는 <타밈>인데 그것은 완전히 허물없는 성실한 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예를 든다면 아브라함은 바른 길을 걸었으나, 롯은 바른 길을 걷지 못했습니다. 또한 아벨은 바른 길을 걸었으나, 가인은 바른 길을 걷지 못했으며, 엘리야는 바른 길을 걸었으나, 아합 왕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공의대로 행복해야 합니다. 공의가 무엇인지 현대인의 상황에 정의를 내리기가 무척 힘듭니다. 사고방식이 다르고 민족적 문화적 사회적 계층에 따라 각자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공의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며 이 하나님의 뜻은 예언자들의 글과 예수님의 교훈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성서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양심에 따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이웃을 돌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마음은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담아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는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음욕, 교만, 불의를 계획하는 등 많은 죄를 저지릅니다. 남에게 숨길 수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범죄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불의와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자세로써는, 첫째로는 남의 험담을 말하지 않은 사람이라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남을 욕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농담 삼아 한 험담이 도가 지나쳐서 싸움으로 발전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은 안 됩니다. 또한 참소해서도 안 됩니다. 둘째로 벗에게 행악을 해서도 안 됩니다. 이방인도 행악하는 자는 배신자라고 하여 상종하지 않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신앙을 이러쿵저러쿵 판단합니다. 남의 일에 시기하여 자기 돈을 써가면서 방해 공작합니다. 교회 일을 자기들끼리 해결하지 못하여 사회 법정에까지 나갑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 셋째,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말아야 합니다. 뇌물 앞에서는 대다수의 사람이 무력해 보입니다. 진시황제의 필생의 대업인 만리장성도 파수꾼 한 사람이 뇌물을 받아먹고 적군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그 성이 무너졌다는 얘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가장 무서운 적은 사회의 뼈 속까지 파고 들어가 있는 뇌물의 해독이라고 봅니다. 이 뇌물 앞에는 시장의 봉사정신이 어디 있으며, 공무원의 기장이 어디 있으며, 교육가의 양심이 어디 있으며, 사회사업가의 자선심이 어디 있으며, 정치인의 양심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대한민국이 발전해 나간다 하니 기적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가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뇌물에 의한 부정부패는 우리 사회에서 뿌리 뽑아져야 합니다. 넷째, 돈 놀이를 말아야 합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진 대부분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고리대금업자들은 이자 낼 돈이 없으면 차압합니다. 고리대금업자들은 사람들을 파산시키고 집을 빼앗아 거리로 내쫓습니다. 또한 쫓겨 가는 사람은 욕설을 하며 저주합니다. 이러한 일을 그리스도인의 해야 할 일입니까? 삼양라면 사장 전중윤씨는 935명의 남자 사원과 1427명의 여자 사원에게 이익을 골고루 배당하는 기업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사원들 간에 일한 돈으로 대금한 (전표장사) 사원 5명을 파면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이웃을 훼방치 않으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맹세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든 점을 종합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의 영혼을 통해서 그를 찬양하고 예배를 드림과 동시에 우리의 모든 불순함과 잡된 생각을 버리고 마음과 모든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자에게는 영원히 요동치 아니한다고 시 15:5에 하반부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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