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침묵 (시 19:1-4)

첨부 1


예수의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빌립은 예수님에게 “주여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고 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신 것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생각인 듯합니다. 빌립의 이 같은 요구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대표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을 한번 만났으면 시원하겠다”고 말합니다. 과연 사람들은 하나님을 한번 보기만 하면 만족할 것입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누구나 다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까? 얼른 그렇게 되리라고 보증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또 세상 사람들은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시 42:3) 하고 질문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면 얼마나 시원할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없다고 방자하던 자는 굴복할 것이요, 하나님을 증거 하는 사람은 확증을 얻어 기뻐하며 개가를 부를 것이 아닙니까? 그렇거늘 하나님은 왜 한 말씀도 하시는 법이 없이 침묵을 지키시고 계시겠습니까? 몹시도 답답해하고 안타까와 합니다. 오늘날 악마가 발호하고 죽이고 찢으며 허위가 가득한 세상, 악마가 승리를 하며 제 세상이라고 스스로 축하에 되취하여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왜 침묵을 지키고 계시겠습니까? 몹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의 침묵을 아는 사람은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이 뜻을 살필 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은 침묵이십니다. 1. 자연 세계를 통한 말씀 창세기에 천지창조설을 보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가운데 하나님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매 빛이 생기고 궁창이 생기고 땅이 생기고 금수가 생기고 초목이 생기고 어족이 생기고 인류가 생겼습니다.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표현하십니다. 유태의 옛 시인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역사와 침묵 가운데 움직이심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로 삼으시며 땅에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사도 바울은 인간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 둔하고 또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경건치 못한 태도를 책망하여 말하기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창조하신 만물이 그의 존재를 설명하지 않습니까? 그의 창조물이 있음을 보아 창조자의 뜻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어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또 안 계신다 하며,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그 앞에서 어찌 경건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핑계할 수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동양의 옛 시인이 “새로써 봄을 울리고, 우레로써 여름을 울리고, 벌레로써 가을을 울리고, 바람으로써 겨울을 울린다”고 읊은 것이 있거니와 그 울리는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이 시는 시 104편의 사상 표현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하여서 말씀하십니다. 찬송가에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노래는 창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그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뜻과 표현과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쁨에 넘쳐흐르는 찬송입니다. 저 자연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은 하나님을 볼 것이요, 저 자연의 음성을 듣는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자연을 통해서 당신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2. 역사적 세계를 통한 말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세계 역사를 운행하십니다. 또한 이 세계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필요하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말씀하신 것을 비롯하여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 뜻을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을 선지자들에게 나타내시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아모스는 말하기를 “사자가 부르짖은 즉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 고 선지자의 예언의 동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민중에게 전하는 자들입니다. 오랜 역사를 두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선포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 때가 이르시매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체를 쏟아 세상에 나타내어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잔잔한 물결에 물매돌이 떨어져 새로운 파문을 일으킨 것처럼 인류의 역사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요한 기자는 이 사실을 기록하되 요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시나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제자들도 깨닫지 못해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면서 “너희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악이 너무도 발호하고 불의가 승리하는 세상을 보고는 때로는 낙심하여 하나님이 계신가? 하나님의 길이 계시는가? 정의가 승리할 것인가? 하고 회의에 싸여 약해지고 주저하고 낙심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좀 더 밝은 안목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로 보고 인내력으로써 역사의 과정을 다시 보면 잔인하고 횡포한 힘이 끝내는 세상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세력이 한 때는 승리를 할듯하지만 마침내 멸망하는 것이 세상의 진리입니다. 선이 약한듯하나 마침내 승리하고야 맙니다. 하나님의 것은 결국 승리하고야 맙니다. 반드시 정의는 이깁니다. 이것이 역사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방법입니다. 작은 눈으로 물건을 보는 이들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보고자 하려면 또한 그 음성을 들으려고 한다면 온 우주를 살피는 넓은 안목과 긴 역사를 통찰할 수 있는 통찰력과 인생의 깊은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관찰력이 필요합니다. 침묵 중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