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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주는 강한 성 (시 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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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일입니다. 장로교의 조상은 존 칼빈이기 때문에 루터에 대해서는 늘 연구를 소홀히 하지만 칼빈이든 웨슬리든 간에 루터의 종교개혁과 개혁정신을 이어받은 전 기독교의 생활에는 모름지기 루터의 생애가 반영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구약 종교의 그늘이 예수님의 강림으로 밝혀졌다면 유물 숭배와 공덕 제일주의에 어두워졌던 카톨릭 교회를 밝은 신앙의 빛으로 비취게 한 것은 마틴 루터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신교가 갈려나오기 위한 혁명일 뿐만 아니라 구교 자체의 경성과 재건의 촉진제가 된 것입니다. 만일 오늘의 우리 교회에도 루터의 개혁정신이 철저해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칼빈이든 웨슬리이든 낙스이든 조지 팍스이든 간에 속죄부(연죄부)를 팔던 로마 교회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마틴 루터의 생애를 더듬어 봄으로 중세기의 종교개혁 정신과 그 정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동족 색소니아주의 아이스레벤에게 “큰 손”이란 별명을 가진 광부인 아버지와 마가렛이란 어머니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 가정은 경건하여 루터의 이름을 성도 “마틴”의 이름을 따서 마틴 루터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과 수많은 성도에게 울리는 기도문을 외우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학우 중 한 사람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1505년 7월 2일 자기 집에서 월피드 대학으로 가는 도중 천둥과 낙뇌와 바람에 실신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루터는 수도사가 되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루터는 1505년 법대 4년 졸업을 두 달 앞두고 성 어거스틴과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법률을 전공하여 변호사 되기를 바랬으나 수도사가 됨으로써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게 되었습니다. 1507년에는 안수식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위텐벡의 목사와 신학교 교수로 일을 했습니다. 그가 로마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캣슬 교회당에서 박사학위 수여식이 있을 때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습니다. 1510년 루터는 우연히 로마에 가서 교회의 부패상을 듣고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루터의 일면을 살펴보면 목사요, 박사인 그는 위텐벡 교회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기를 좋아했고 성경 선생으로서의 기쁨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로마 교회의 부패상을 노골화했습니다. 레오10세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의 수축을 위하여 속죄부의 판매 계획을 실천했습니다. 따라서 유물 숭배는 날이 갈수록 성행했습니다. 실로 루터가 봉직한 위텐벡의 겟슬 교회에도 19,000개의 유물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말구유, 예수님이 맞으신 가죽채찍,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조각들, 이런 것이 많을수록 권위가 있고 이것은 헌금하는데 필요했던 것입니다. 속죄부의 판매는 늘어갔습니다. ‘속죄부란 범죄 상태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죄악의 징벌까지 해제된다’고 선전하고 ‘연옥의 생활이 두렵거든 이것을 사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까지 사라’고 말했습니다. 독일에서 속죄부를 파는 특권 즉 총판매권(전매청권)을 부렌텐벡의 알버드 감독에게 있었습니다. 알버드 감독 밑에 존티젤이 있었는데 그는 교묘한 설명을 붙여 연보를 강요했습니다. “연보궤에 돈 떨어지는 소리가 내가 곧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당에 들어간다”라고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돈이 쩔렁 돈궤에 떨어질 땐 그 영혼은 저 천당에 편히 쉬리 날아오르리” 이러한 부패상에 반항하며 일어선 것이 마틴 루터인 것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반박문이 겟슬교회당 정문에 붙었습니다. 1920년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교서를 보냈습니다. 6일 간에 루터는 주장을 철회하고 법황청에게 복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루터는 법황의 교서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1921년 국회가 독일 월스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법황은 찰스에게 루터를 정죄할 것을 권했습니다. 찰스는 국회에 권고하여 루터를 “공권”손실자로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섹슨” 선거후와 다근 공후들이 루터의 말을 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루터는 월스에 불려가게 되었습니다. 국왕 찰스는 안전 통행증을 붙여 루터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친구들은 “요한 훗스도 안전 통행증을 가지고도 태워 죽였다 그러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지붕의 기와장처럼 많은 마귀가 나를 치려하여도 나는 가겠노라”고 하는 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월스로 갔습니다. 그해 4월 16일 국회 앞에 루터는 서게 된 것입니다. 루터가 쓴 20권의저서 목록이 낭독되었습니다. “네가 쓴 것이냐”, “그렇다”, “철회한 의사는 없느냐” 철회하면 모르지만 반항하면 최후가 된 것입니다. “시간의 여유를 달라” 이튿날 국회에 나타난 루터는 자기의 저서를 전부 설명했습니다. “(1) 신앙과 도덕에 관한 것인데 하나 죄 될 것 없다. (2) 교황 공격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철회할 수 없다. (3) 개인을 공격한 것인데 성도의 교훈으로 정죄 된다면 모르되 철회 할 수 없다”라고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성경과 의로 자기를 권고함이 아니면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다. 양심을 속이고서도 하는 일은 안전하나 옳은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하고 사자와 같이 울부짖었습니다. 안전통행증이 끝나는 날 루터는 귀로에 올랐습니다. 중도에 무엇이 숨어 있다가 달려들지 모릅니다. 아니나 다를까 루터는 돌연 무장한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어디로인지 끌려갔습니다. 얼굴은 검은 보자기로 싸고 말을 태워서. 그러나 그것은 원수가 아니라, 루터의 지지자 “색슨” 선거후 “프레드릭”이였는데 자기의 산성인 왈트벅 산성으로 루터를 데려다 보호한 것입니다. 루터는 여기서 3개월 동안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찰스 창제는 루터를 파문자로 선포 했고 루터는 20일간에 모든 것을 철회치 않으면 루터는 사형수와 같은 죄인 취급받는 것이요 루터를 도와준 자도 처벌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쫓겨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레드릭은 루터를 산성에 보호해 주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개혁정신과 루터의 생애를 연결하는 하나의 힘을 찾아야겠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두 원리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1) 사람이 의롭다 함을 입은 것은 내적 신앙만으로써요 교회의 형식이나 교직자만이 집행할 수 있는 성례전(싸크라멘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입니다. 모든 사도는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루터의 기독자의 자유에 표현했으며 이 자유를 압제한다면 사람은 여기 반항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우리에게 신앙을 주는 그 근원으로써의 하나님은 은총과 신앙의 내용으로써의 진리를 성령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의해서 계시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성경이 종교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다고 주장합니다. 이상의 두 가지는 카톨릭 세계에 있어서는 청천의 벽력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주장은 카톨릭의 모든 제사제도를 부인하고 모든 물질적 수입을 막는 것입니다. 성서 제일주의는 베드로 피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이켜 루터의 생애를 더듬을 때 어디서 이렇게 굳건한 논리가 나올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루터는 사실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친구가 죽는데 쇼크를 받았고, 낙뢰에 실신을 하고, 그가 거하던 거실의 잉크 자국은 허깨비를 치려고 던진 잉크 자국입니다. 성격상 결함도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잘하기만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고집이 세고 거친 점도 있었습니다. 농민의 반항이 일어났을 때에 귀족에게 진멸해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 후 귀족들은 농민들을 진멸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시편 46편의 내용처럼 담대한 신앙이 있었기에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 하이네가 종교개혁의 “마르세이유” 라고 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찬송이 곧 그의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롬 4장을 해석하면서 루터는 더욱 강렬히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도움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시편을 영창 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를 생각하며 위텐벡 겟슬교회당 앞에 95개 조문을 내어다 걸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옛 원수 마귀는 이때 힘을 써 궤휼과 권세로 재물을 삼으니 천하에 적수 없도다”라는 말씀도 그의 힘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산성과 같은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하는 믿음을 가지고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겁쟁이, 나 같은 무식무능한 사람도 능히 악마가 들끓는 사회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막아주실 것을 믿고 나아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루터의 개혁정신과 루터의 신앙을 본받는 우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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