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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심에 진실 (시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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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는 현대를 정의하여 첫째로 참이 분실되어 있고 둘째, 신의가 결핍되어 있고 셋째, 인격을 상실한 시대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율법에 의해 십 분의 일을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같이 아주 중요한 율법은 무시하고 있다”(마 23:23)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진실이란 무엇입니까? 막사이 상을 탄 김 용기 장로는 커다란 조이삭을 높이 쳐들어 보이면서 “이것이 바로 진실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진실의 의미는 성실과 같은 것으로 진리를 구하는 의지요, 자타를 속이지 않는 정직한 마음의 뿌리요, 대인 관계에서의 언행의 태도와 의지가 일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유명한 참회의 시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솔직히 자기의 죄를 고백함으로 사함받기를 원했으며 죄가 깨끗이 씻겨지길 간구하였습니다. 6절에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속 부분에 진리를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입니다. 삼상 16:7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요구하신 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도 눅 6:45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 중심에 무엇이 가득히 쌓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선을, 혹은 진실함을 가득히 쌓으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중심의 진실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1. 중심의 진실한 회개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회개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윗의 회개는 곧 진실이었습니다. 참된 의미의 진실이었습니다. 참이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진실과 사실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진실은 다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true와 real의 차이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사실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진실 곧 회개였습니다. 가장 큰 진실이 회개입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회개는 위선입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입니까? 죄를 짓는 나와 의를 행하는 나 중에서 어느 쪽이 참된 나입니까? 의로운 내가 어쩌다가 실수한 것입니까? 아니면 본래 나는 죄인입니까? 다윗은 여기서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나의 나됨이 곧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시인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진실이요 회개의 정체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의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전파할 때 맡은 사람들이 세례받으러 나왔습니다. 이 때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리켜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생각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이들은 진실한 회개 없이 세례를 받으러 나왔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는 죄를 지은 후 심히 통곡하며 중심에서 회개하였습니다. 참 회개에는 중심에서 애통하는 눈물이 있습니다. 이 애통의 눈물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완전히 중심에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는 죄를 사랑하였으나 이제는 끊어버리고 방향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외부만의 회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한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2. 중심에 진실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산상보훈에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구약에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부르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하시는 말씀이 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왜 행함이 없습니까? 그곳에 믿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습니까? 내세를 믿습니까? 천당과 지옥이 있는 줄 믿습니까? 마음 중심에 진실한 신앙이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배우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연극을 해서 사람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데 너희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엄숙한 사실을 가지고 무력하게 전도를 하니 웬 일인가? 내가 만일 당신들의 신앙을 가졌다면 하루라도 그냥 앉아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된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3. 진실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요 21:15절 말씀에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나타나셔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흑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곧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세 번 물으시니 베드로는 조심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께서 지금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떤 사람보다도, 어떤 물건보다도, 돈, 지위, 향락, 정욕, 세상에 있는 무엇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우리는 베드로처럼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성 프랜시스가 말을 타고 앗시스의 교외를 산책하는 중에 한 문둥이가 그에게 와서 구걸한 때가 있었습니다. 마침 프랜시스는 가진 돈이 없었습니다. 그는 말 위에서 내려와 문둥이의 두 손을 꽉 붙잡고 “형제여 마침 가지고 있는 돈이 없으니 용서하시오 내일 이 시간 꼭 가지고 와서 도와드릴 터이니 기다려 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문둥이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닙니다.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바로 이 진실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지난 날 벨기의 젊은 사제인 다미엔 신부가 나환자 섬인 몰로카의 섬의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는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거칠어진 나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느라고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어느날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환자가 아닌 내가 나환자인 저들에게 아무리 설교를 해보았자 무슨 효과가 있을 것인가?” 그는 결심하고 선교를 위해 스스로 나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일그러지도록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환자들의 마음 속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전기를 보면 두 개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늠름하고 잘생긴 때의 모습이요, 또 하나는 말년의 눈과 코가 모두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아무도 강제로 한 것은 아닙니다. 그 스스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가 나환자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실로 사랑의 깊이란 얼마나 사랑하는 자와 하나가 되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켰는가에 따라 측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중심의 진실한 회개, 사랑,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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