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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리는 삶 (시 13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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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구원에 대한 소망을 기다리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구약은 메시야를 기다리라는 약속의 말씀이며, 신약은 재림 예수를 기다리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점에서 오늘은 기다리는 삶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각기 목표를 가지고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그가 무엇을 기다리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물질과 명예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헛된 것이기에 그들의 삶 자체가 헛것입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삶의 참된 인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욥이었습니다. 욥은 사탄의 시험으로 자식도, 재산도, 명예도, 상실하였지만 그것은 욥이 바라던 것이 아니였기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욥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있었기에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영원을 사모한 결과 그는 옛 것을 다 회복하는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현대인들의 비극은 그들이 기다리고 살아가야 할 궁극적인 기다림의 대상을 발견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대인에게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해 주는 것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히브리 시인은 자기는 여호와만을 기다리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시 130편 5절 이하에서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노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을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히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파숫군이 아침을 간절히 기다린다는 것은 일선 참호 속에서 보초로서 밤을 새워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또 병 중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앓으면서 날이 새기를 기다려 본 환자들은 조금은 이 말의 뜻을 이해할 줄 압니다. 이것은 매우 간절히 기다리는 사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간절히 하나님을 기다렸습니까? 그는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만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주님의 말씀대로,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소유할 때만이 인간은 지상의 행복을 경험하게 되며 삶을 축하하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공자도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진리를 터득했을 때 이 진리를 위해 자기의 시간과 물질과 생명까지도 모두 쏟아 바쳐 이 진리를 전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도 이 진리를 깨달았을 때 재산도 명예도 초개같이 버리고 이 진리를 위해 살았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 진리를 발견했을 때 이 진리 속에서 지금까지 찾고 있었던 행복을, 그리고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참 평안을 경험했습니다. 리빙스톤과 시바이쩌도 이 진리를 깨달았을 때 가난하고 무식하며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명을 억제할 수 없어, 일생의 저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묻은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의 전체 삶을 쏟아 바치고 불사를 수 있는 어떤 진리의 대상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리가 오직 여호와께 있다는 사실을 히브리 시인은 삶의 체험을 통해 발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시인처럼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강렬한 기다림이 있습니까? 주임은 1990여년 전 역사 속에 인간으로 오셨고 지금도 성령으로 찾아 오시며 또한 역사의 종말에 심판주로 강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재림 주 그리스도를 맞이하며 모셔 드리기 위해서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종교입니다. 이것을 흔히 신학적인 용어로 “순례자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크리스챤이란 캄캄한 밤중에도 새벽을 기다리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의 삶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난과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영국 사람은 어떤 사업을 할 때 3대가지 내다보고 한다고 합니다. 참 부러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은 자기가 심은 과일나무에서 자기가 과일을 따 먹으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래 과수나무를 심지 못하고 맙니다. 너무 조급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것이 우리의 기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먼 장래를 내다보는 인내의 자세가 우리에게 몹시 아쉽습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인스탄트 시대입니다. 따라서 즉각적인 결과에만 모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즉각적인 요구가 때로는 다이나마이트 만큼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는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찬 인생은 가을의 수확을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농부와 같이 인내의 비결을 터득한 자에게 찾아오는 축복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인내 없이 이루어지는 위대한 결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퀴리 부인은 400번에 걸친 지루하고 피나는 실험을 통해 라디움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삶은 우리에게 준비를 요구합니다. 준비 없는 기다림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그들은 모두 함께 신랑을 기다렸지만 준비있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만이 신랑을 맞이했고, 준비 없는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교훈은, 우리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언제나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다림, 그것은 곧 준비하는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준비 없는 삶에 성공은 결코 찾아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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